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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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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비양심적인 사회일수록 양심을 부르는 자는 많으나 양심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적다. ‘대한민국에 한 가닥 양심이 살아 있는 한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는 이명박의 말과 ‘이명박은 양심선언하고 새출발하라’는 이회창의 말에서 양심은 협박과 뻔뻔함의 동의어다. 그럼에도 여론이 이들을 지지하는 것은 이 땅의 누구도 진정한 양심을 돌보지 않는다는 체념 때문이다.10월29일, ‘삼성제국’의 비리와 불법,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공모 사실을 고백한 김용철의 양심에 응답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 20일이 지났다. 그렇지만 시장권력을 동원하여 모든 권력기관을 관리 감독해온 삼성제국의 대변인 혹은 장학생으로 의심받아온 청와대·검찰·금융감독원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보다 은폐하는 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할 기회를 저버리고 삼성에 증거인멸을 위한 시간을 제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정치라도 펼칠 것처럼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했던 참여정부가 한탄하는 시민의 양심을 돌볼 의지와 힘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다. ‘권력은 정부가 아닌 시장이 가지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는 삼성제국의 마름이다’라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참여정부가 참회정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진 근본적 이유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의뢰인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김용철 변호사의 징계를 검토한 대한변호사협회는 참회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국가권력과 사회적 불의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대변해야 할 변호사들이 개인의 양심보다 변호사의 의무를 더 우선시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파렴치에 가깝다.
양심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랫동안 고귀한 가치로 인정받아왔다. 동양에서 양심은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에서 하늘의 법도와 사람의 법도를 연결하는 도덕 감정을 지칭했다. 반면 서양에서 양심(conscience)은 말 그대로 ‘함께-앎’을 뜻하는 말로서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동서 문화권 모두에서 양심은 도덕과 법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정당성 유무를 판가름하는 잣대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법치국가는 양심을 실정법이 침범할 수 없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 곧 인격체가 갖는 최고의 자율적 심급으로 인정한다. 물론 다양한 의미변화와 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양심의 자율성과 도덕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도 제기되었다.
양심이란 전승된 사회문화적 가치를 대변하는 초자아의 보이지 않는 감시에 타율적으로 복종한 내면의 감옥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규범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는 양심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비판이다. 양심에 기초한 행위가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결과를 수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심이 주관적 진실성을 넘어 객관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몇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양심이 진정성을 확보하려면 먼저 자기의 이익보다 손해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자기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어야 하고, 특수한 가치관보다 공공성을 우선시해야 하며, 타인에 의한 비판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자신에 의한 번복 가능성은 차단해야만 한다.
앞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그 때문에 그의 양심은 변호사의 의무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들은 한 시민의 양심을 외면하고 삼성제국 보호에만 앞장서고 있다. 이들에게도 양심의 법정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믿어야 할까!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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