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29 20:29
수정 : 2018.04.29 20:41
김유익
다문화 ‘생활’ 통역
3월에 서울을 찾은 세계적 디자이너 하라 겐야의 ‘미래의 주택’ 세미나 소식 중, 유독 반갑게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었다. 농사와 업무를 함께 할 수 있다는 테라스 오피스. 기사 설명을 보니 농촌에 설치된 이 농막 같은 사무실에서 그가 아트 디렉터로 일하는 무인양품(MUJI) 직원들이 쉬면서 농사일을 돕는다고 한다. 나는 작년 봄에 사진 속에 막 설치된 일본 지바현 가모가와시의 현장에 가서, 농사 체험을 온 도쿄의 중학생들과 함께 피사리를 하고, 새참을 먹은 후에 이곳에서 낮잠을 청했었다. 곧 무선인터넷이 설치될 예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다랑이논이 눈맛 시원하게 펼쳐진 이곳에서 사무도 보고, 농사일도 돕고, 휴식도 취한다는 이야기가 빈말이 아닐 터였다.
이 논의 관리자는 20여년 전 이곳에 귀농해서 다양한 지역활동을 펼치는 하야시 요시키씨지만, 주로 도쿄에 거주하는 도시민들이 공동 소유하며 철마다 찾아와 일손을 거들어 수확을 나눈다. 근처에는 일본에 정주하는 외국인을 포함한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이 만든 해커팜도 있어서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귀촌한 이들이 농사로 자급하고, 본업으로 약간의 현금 수입도 얻는다는 ‘반농반X’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하야시씨가 소개해준 이곳의 진짜 매력은 이 도농복합지역에 위치한 다양성 넘치고 아름다운 지역 생태계였다.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태평양 경관이 멋진 휴양병원 등 지역에 기반한 중소 규모 비즈니스와 대기업, 그리고 고령의 농민, 귀농·귀촌한 젊은이들, 이곳을 정기적으로 찾는 도시민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농촌. 지바대학교와 기업 등도 함께 참여해서 폐교를 고쳐 만든 코워킹 스페이스도 얼마 전 오픈했다고 한다.
하야시씨가 이주한 후 직접 친구들과 개조해서 가족과 함께 살며 커뮤니티 모임 장소로도 자주 활용하는 200년 된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생태 화장실과 화덕, 지금도 사용하는 일본의 전통 농기구와 공예품이 어우러져, 마치 그림 같았는데, 이때 느낀 아늑함은 단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생동감과 심미는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공투 세대로, 옥살이까지 했던 고 후지모토 도시오씨는 일본의 소비자들에게 건강한 유기농 먹거리를 일찍부터 제공한 기업 ‘대지를 지키는 모임’의 초대 회장을 역임한 후 80년대 이곳으로 정착한 일본의 귀농 1세대이다. 또, 우리와도 인연이 깊고 민중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공예품의 실용성의 미학을 ‘민예운동’으로 승화시킨 종교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정신이 일본의 현대 디자인과 생활인들의 삶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천년에 이른다는 지역 역사를 간직한 신사도 여전히 단정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라이프 스타일을 상품화하려는 얄팍한 장삿속만도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젊은 문화기획자, 디자이너와 향촌건설 운동가들이 일본의 농촌과 민예운동의 발원지, 꼭 필요해서 고쳐 썼기에 오랜 기간 살아남은 아름답고 쓸모있는 물건들이 많은 장소들을 요새 부쩍 찾고 있다. 이제 먹고살 만해졌기에 중국의 농촌과 도시도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건강한 삶, 지속가능한 삶,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딱히, 유커를 다시 유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도 지역에 기반한 삶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나가는 심미안을 가꾸고 실천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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