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30 18:31
수정 : 2018.04.30 19:09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2006년 5월4일 새벽 평택 대추리는 경찰과 군인 1만6천여명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해 3년 동안 투쟁하던 대추리 주민들에 대한 행정대집행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진압 작전은 저녁이 다 되어 끝났다. 격전지 대추초등학교에선 하루 종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 나왔다. 524명이 체포되었다. 주민들은 하루 종일 울었다. 그 아수라 속에서도 경찰은 보란 듯이 포클레인으로 학교의 기둥을 쓰러뜨리고 나무들의 허리를 분질렀다. 군대가 쳐들어와도 끝까지 싸우겠다던 주민들의 의지가 꺾인 것은 그때였다.
미군기지에 수용될 그 옥답들은 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었던 허리 굽은 노인들이 시퍼렇게 젊었던 시절 바다를 메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가래로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갯벌 위에 모를 심었다. 소금기 때문에 모가 빨갛게 타버리기 일쑤여서 한해에도 세번 네번 모를 심었다. 그 일을 수년간 반복한 끝에 갯벌은 비옥한 논이 되었다. 마을의 풍요를 반영하듯 아이들이 늘어났다. 주민들은 집집마다 쌀을 걷어 학교 부지를 샀고 교육청에 기부했다. 1969년 대추초등학교는 그렇게 개교했다. 학교는 그들의 지독했던 가난과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던 꿈과 의지였고 피와 땀이었고,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학교가 부서지자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못 이긴다”는 체념을 타고 “협의하고 나가면 8평 상업용지 분양권을, 협의하지 않으면 5평의 분양권을 준다”는 소식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모두 똘똘 뭉쳐 땅을 지키자고 촛불을 들었던 밤에도 누군가는 야반도주하듯 동네를 떠났다. 정부에선 “이사 지원비를 받으려면 집을 부수고 떠나라”고 했다. 빈집이 ‘외부세력’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울면서 자신의 집을 부수었다. 나는 부서진 집의 더미들을 영상으로 보았을 뿐인데, 그것은 마치 난자당한 시신에서 창자가 쏟아져 나온 듯 처참했다. 마을은 집의 시체들로 즐비했다. 집도 학살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마을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2007년, 마지막까지 싸우던 40여가구가 대추리를 떠났다. 그들은 실향민이 되었고 실업자가 되었다.
전쟁 같았던 5월4일 행정대집행으로부터 12년, 울면서 마을을 떠났던 때로부터 11년이 흘렀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기 위해 평택 노와리의 이주단지를 찾았던 나는 세번 놀랐다. 새로 조성된 마을의 아름다운 외관에 한번 놀랐고, 동네를 돌아보고서는 그 적막함에 두번 놀랐으며,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집 안 가득 채운 한숨과 체념에 세번 놀랐다. 정부는 이길 수 없다는 체념과 패배감, 다시 못 볼 사이가 되어버린 이웃에 대한 그리움과 비애, 노년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들이 잃은 건 피땀으로 일군 땅뿐만이 아니라 돈으로는 보상할 수 없는 공동체의 역사 그 자체였다.
정부는 생계대책으로 내놓았던 상업용지도 아직 공급하지 않았고, 이주 후에도 ‘대추리’라는 행정 지명을 쓰도록 해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던 날, 나는 11년 전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묻었던 소원들을 보고 있었다. “평화는 온다. 반드시.” 그날만은 그것이 대단한 예언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 옆의 이런 말에도 가슴이 뛰는 것이다. “다시 온다.” 평화가 온다는 건,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러니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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