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02 18:45
수정 : 2018.05.02 19:00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연구소 소장
지난 주말부터일까, 10년도 더 전에 가봤던 평양이 자주 생각난다. 2003년 3월과 2007년 5월 두 차례, 보건 분야 지원사업 경과를 살핀다면서 북한 일부를 경험했다. 동행이 많고 일정이 주마간산이라 하나를 보고 열을 짐작해야 했으나, 몇 가지는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둘러본 곳 가운데 보육시설이 들어 있어 그랬겠지만, 애들을 제대로 먹이는 문제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마음이 먹먹하다. 병원 시설과 장비, 의약품도 ‘고난의 행군’을 거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붕괴’라는 말이 저절로 입 밖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경제가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식량과 에너지 같은 사회 기반, 병원이나 의약품, 의료체계를 비롯한 보건의료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에겐 흔하디흔한 의약품만 해도 그렇다. 공장을 짓거나 외국에서 수입해야 몇백 가지 기본이라도 갖출 수 있다. 국제기구인 글로벌펀드까지 나서서 기초 중의 기초 의약품, 결핵약 지원사업을 계속했을까.
남북 정상회담을 명분 삼아 꺼내는 이야기가 바로 이 결핵약 문제다. 사실은 정상회담 전부터였다. 국내외 전문가 모두 혹시 북한에 결핵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유행하지나 않을까 애를 태웠다. 2010년부터 북한의 결핵 사업을 지원한 글로벌펀드가 오는 6월부터(!)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예고하면서 생긴 사태다. 의심스러운 국제정치가 작동한 결과임이 분명하지만, 이유는 나중에 따지자. 결핵약을 중간에 끊으면 내성균이 생기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슈퍼 결핵’이 창궐할 위험도 있으니, 공중보건의 위기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6월이 코앞이니 우여곡절이 남은 남북관계가 정상이 되기를 기다리면 때를 놓친다. 북-미 정상회담을 보고 행동하면 더 늦는다. 6월 이후에도 글로벌펀드가 지원을 계속하게 하든가, 세계보건기구가 역할을 하든가, 이도 저도 안 되면 당장 남북한 당국이 같이 나서야 한다. 슈퍼 결핵은 국제정치보다 훨씬 성미가 급하고 더 냉혹하다.
왜 우리가 나서야 하는가? 북한의 결핵(특히 다제내성 결핵) 유행은 남북관계나 핵위기와 무관하게 남북과 국제사회가 같이 책임지고 막아야 한다. 흔히 인도주의를 말하지만, 차원을 넘어 공중보건 위기에 공조하는 것이 모든 국가의 의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에 에볼라가 유행할 때 미국과 영국이 무엇을 했고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위장평화’가 맘에 걸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국경에서 균을 거를 수는 없는 법, 결핵 유행과 내성균, 슈퍼 결핵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과제이기도 하다. 북한 리스크가 없어도 이미 결핵 ‘대국’이 아닌가. “감염병 예방과 안전은 모든 나라가 혜택을 누리는 국제 공공재”라는 것이 요즘의 정설이다.
말이 나온 김에 보태자. 결핵약이 급하다고 했지만, 응급으로 치면 북한 어린이와 임산부 건강도 그에 못지않다. 인도적 지원이든, 투자라 생각하든, 또는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이든, 명분이야 무엇이면 어떤가. 어떤 갈등과 긴장이 있어도 목숨을 구하고 고통을 줄이는 일은 미룰 수 없다.
남북과 북-미 사이에 평화의 물꼬가 트였으니 여건은 어느 때보다 유리하다. 건강과 보건을 위한 인도적 교류협력은 가장 필요하고, 시작이 쉬우며, 결과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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