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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8 18:42 수정 : 2018.05.28 19:03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제물포터널과 서부간선 지하도로가 교차하는 우리 동네(서울 영등포구 양평동)는 공사판이 된 지 오래다. ‘제물포 서부간선 지하도로 양평유수지 비상/배연구 민관협의체’에 나온 주민들이 집이 흔들리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하면 공사 관계자들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다. “발파 진동의 관리 기준은 0.3카인인데 지금은 0.05카인입니다.”

요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인데, 앞뒤 숫자를 바꾼다 해도 주민은 알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다. 주민 측 위원보다 5배쯤 더 많은 공사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낯선 토목용어들을 서너시간 동안 듣고 있다 보면, 저들은 인간이고 나는 한마리 노루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무척 당황스럽고 굴욕적이며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이다.

내 입에선 고작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같은, 하나 마나 한 말밖에 나오질 않는다. 저들의 언어가 정교한 문명의 것이라면 우리의 불안은 그저 원시의 소리 같다. 그럼에도 나는 터널 발파 공법이나 매연 정화 시스템 따위를 공부하는 데엔 단 하루도 쓰고 싶지 않은데, 혹여 정의감에 불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 해도, 어설프게나마 저들의 토목용어 일부를 더듬더듬 구사할 즈음이 되면 터널 준공식이 거행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노루가 인간의 언어를 배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바로 이런 생각이 저들이 노리던 바였고, 부끄럽게도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서, 더 이상 민관협의체에 나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동네 생태공원이 있던 자리에 축구장이 건설된다는 발표가 있었다. 소음, 주차난 등의 문제를 들며 반대 의견을 이미 전달했는데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답답한 주민들이 구청을 찾아갔을 때 한 여성 주민이 말했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산책할 곳이 없어서 아파트 놀이터를 전전하고 있어요.” 또 다른 여성이 말했다. “남편하고 다툴 일이 있어도 아이 앞에선 싸울 수가 없으니까 공원 가서 이야기도 하고 화해도 했어요. 공원이란 그런 곳이에요.” 나는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그녀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내 눈엔 그들이 이제 막 도로 위에 발을 들여놓은 노루처럼 이질적이고 위태로워 보였고, 그녀들의 부드럽고 축축한 목소리에 전혀 공명하지 못하는 구청 문화체육과 사무실은 한층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의 남성 관료가 참을성 있게 듣지 못하고 역정을 내고 말았는데, 예상과 달리 노루들은 전혀 쫄지 않고 도로 한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아이들은 어디서 뛰어놀죠? 그 작은 땅마저 꼭 빼앗아야 하나요? 축구장은 남자들만 좋은 공간이잖아요.” 그 순간 나는 무언가가 역전되었다고 느꼈다. 이 세계를 떠받치는 질서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가냘픈 다리로 딱 버티고 선 노루가 한없이 위엄 있어 보인 것이다.

11억 예산의 축구장도, 1조원의 지하터널도, 규모만 다를 뿐 그 추진 방식이 똑같다. 처음 겪어본 관의 행태에 무력감과 패배감을 갖고 있던 나를 다시 일깨운 것은 생명을 키워낸 사람들의 생생한 언어였다. 고통과 희열, 자긍심이 알알이 박힌 따뜻하고 보드랍고 축축한 말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지하세계가 아니라 여기에서부터라면 뭔가 시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른과 남자, 자동차가 점령해버린 이 도시에 여성과 아이, 노인과 장애인 그리고 노루의 영토를 조금씩 넓혀가는, 작지만 확실한 승리의 경험 같은 것 말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종종 노루가 인간이 되었다는 기적이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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