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7.04 18:32
수정 : 2018.07.05 14:12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혐오가 도처에 가득하다. 사회적 경제, 사회혁신 등 ‘사회’란 수식은 범람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목도하는 것은 상호의존의 ‘사회’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비사회적 풍광이다. 국토에 난민 유입을 막겠다고, 동네에 청년임대주택 건립을 막겠다고, 캠퍼스에 불온한 강연을 막겠다고 항전을 치른다. 댓글이든 국민청원이든, 모두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면서 다름을 거부하기 위해 직접행동을 불사한다. 이렇게 계속 빗장을 걸어 잠그다 보면 어떤 공동체가 남을까? 가족이라고 안전할까?
밟지 않으면 밟힐지 모른다는 불안은 전쟁과 분단을 거쳐온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집단심성으로 남았다. 하지만 제도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동시에 출몰한 1990년대 이후 더 증폭되는 것 같다. 경쟁과 효율, 자기방어에 최적화된 삶의 기저에 경제적 불안정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기술발전과 경제의 금융화로 고정적 일자리 대신 파편화된 일거리만 양산될 뿐이라면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물질의 빈곤과 관계의 빈곤을 완화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기본소득의 의미를 환기하고 싶다. 모두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인 현금을 지급하자는 제안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역사를 경유하며 진폭을 키우다 21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울림을 내기 시작했다.
임금노동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은 수명을 다했고, 완전고용을 전제로 한 사회보장 시스템도 한계에 직면한 지 오래다. 지금도 끔찍한 소득불평등이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미래에는 더욱 심화되리란 전망이 쏟아진다. 더구나 지구는 더 많은 공장을 짓는 게 능사가 아님을 미세먼지와 스모그, 기후변화로 연일 증명해내고 있다.
이런 배경들이 기본소득을 공론화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나, 기본소득은 여전히 동상이몽의 의제로 남아 있다. 생태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이행전략인가? 원치 않는 일과 조직에 종속되는 대신 개인의 자율성을 발양하는 기회인가? 기존 복지 시스템을 축소하거나 간소화하기 위한 전략인가? 기술발전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고 구매력 있는 소비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기제인가? 아니면 이미 수명을 다해가는 자본주의의 연명장치에 불과한가? 정당성의 논리가 다르다 보니 실험이나 제도화, 재원에 대한 생각도 제각각이다. 논의의 스펙트럼이 진보와 보수를 가로지르다 보니 갑작스레 찬사를 받다가도 한순간 잊히고 만다.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나는 다양한 기본소득 실험이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혹은 살 수밖에 없는가)를 질문하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최근 인류학자들은 기본소득을 (토지에서 데이터까지) 지구의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몫으로 인식하고, 자격을 묻는 성원권이 아니라 ‘존재’에서 이 몫의 근거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우리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라(one of us)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among us), 적극적 환대라기보다 사회적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분배가 인류학자들의 현장연구에서 곧잘 발견된다.
토머스 위들록에 따르면 이 의무감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통렬한 인정을 기초로 한다. 인간이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존재라면, 기본소득은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적 자율과 상호의존을 배양하는 공유적 실천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기본소득을 ‘공생배당’이라 불러도 좋겠다. ‘우리’와 ‘그들’을 필사적으로 구분하는 대신, 곁에 왔으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공생의 숙명을 인정하는 것. 제주에서도 간혹 그 풍광이 엿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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