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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3 18:08 수정 : 2018.07.24 15:09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친구가 글쓰기 강좌를 듣고 싶어 했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고 전동휠체어를 탔다. 서울 신촌의 한 빌딩 내에 있는 문화센터를 추천해주며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없어도 괜찮다” 했다. 그런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으며 충분히 참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를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낮게 설치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뒤통수를 한대, 아니 두대쯤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한대는 그녀가 강좌 하나를 듣기 위해 저녁 내내 오줌을 참는 일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었고, 또 한대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고려사항 목록에서 무려 화장실을 뺀 자리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넣는다는 점이었다. 버튼의 높이 같은 것은 얼마나 사소한지, 나는 심장이 조금 아픈 느낌이었다.

서울 신길역에서 한경덕씨가 사망했다. 버튼의 위치 때문이라고 했다. 베트남전 상이군인이었던 그는 1986년 교통사고까지 당해 하반신과 왼팔이 마비되었다. 1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려던 그의 앞에 절벽과도 같은 계단이 나타났다. 리프트를 타기 위해 역무원을 호출해야 했다. 버튼은 절벽 앞에서 조그맣게 빛나고 있었다. 왼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그는 왼팔을 쓰지 못했다. 오른팔을 버튼 가까이 밀착시키기 위해 그는 계단을 등진 채 휠체어를 조심조심 움직였고, 순간 동그란 바퀴가 각진 계단의 모서리를 벗어났다. 그의 몸은 지난 10년간 그와 고락을 같이해온 육중한 중고 독일제 전동휠체어와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98일 후 세상을 떠났다.

오래전 나는 실제 리프트 추락사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사고를 당한 이는 내가 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집회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그를 동료가 우연히 촬영하던 중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100㎏이 넘는 전동휠체어에 짓눌리며 시멘트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두개골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 무엇보다 섬뜩했던 건 그날 그 리프트를 탄 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것도, 그가 살아남은 것도 우연처럼 보였다. 그것은 장애인들만의 폭탄 돌리기 같았다.

리프트 사고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촉발한 사건 역시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사망한 일이었다. 리프트를 철거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겠다는 이 ‘사소한’ 투쟁은, 실은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지 않은지를 증명하듯 17년간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이 죽고 다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고는 반복되었다. 서울시는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신길역과 서울교통공사는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며 버튼조차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장애인의 몸을 멸시한다.

신길역 계단 위에 섰다. 한경덕씨를 낭떠러지로 밀어낸 버튼은 원래 있던 위치에서 1m쯤 왼쪽으로 옮겨져 있다. 전쟁에서도,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남은 한 위대한 생명이 고작 이 작은 버튼에 닿으려다 무너졌다는 사실에 심장이 아프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버튼의 높이나 위치를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호출버튼 누르기. 그것이 한경덕씨가 지상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지만 아직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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