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7.25 18:28
수정 : 2018.07.25 19:14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연구소 소장
며칠 전 정부가 낸 보도자료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개발 이력이 짧고 연구결과가 부족하여 신의료기술평가에서 탈락하던 혁신·첨단 의료기술을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고, “연구결과 축적이 어려운 혁신·첨단 의료기술은 문헌 근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허용하겠단다. 연구와 근거가 부족한 의료기기를 사고팔고 사람에게 쓸 수 있게 하겠다니, 정상 정부가 할 수 있는 소린지 말문이 막힌다.
대통령이 현장 이벤트에 참석하고 규제 혁신을 발표할 정도로 정권과 정부 전체의 작품이라는 것이 더 실망스럽다. 현 정부가 내세우는 경제 브랜드 ‘혁신성장’의 핵심 전략이 겨우 이 정도냐는 답답함은 제쳐 두더라도, 의료를 산업으로 보고 무슨 성장이니 잠재력이니 국제 경쟁력 따위를 찾는 것은 혁신도 개혁도 아니다. ‘의료산업 대망론’과 ‘규제 원죄론’은 지난 정권들이 내걸었던 경제 패러다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표현만 다를 뿐 낡고 낡은 구식이다.
실망감을 누르고 이제라도 잘못을 청산해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만 적는다. 첫째, 의료기기 산업은 성장동력이 되기 어렵다. 산업 규모가 작아 성장률이든 일자리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데다, 우리 경제가 필연적으로 의존해야 할 세계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말할 처지가 아니다. 국내에서 힘을 길러 세계에 진출한다고? 이런 전략이 통할 수도 없지만,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기를 두고 한국 사람을(어느 나라 사람인들) 테스트베드로 삼는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비도덕 경제’다.
둘째, 의료기기가 선도해 의료 ‘시장’이 커지면 국민이 더 많은 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 고통이 줄고 건강이 좋아진다면 당연히 그리해야 하지만, 효과 없이 돈만 더 쓰는 것이면 값없는 희생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연구결과와 근거가 바로 이런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것, 그리고 이 작업이 의료기기 규제의 핵심임을 잊지 말자. 이것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을 보면, 규제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의료기기의 이익과 부담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셋째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경제 논리보다 생명과 건강이라는 가치가 먼저다. 의료기기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직접 개입하고 침투하는 것이라, 최악의 경우에도 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리키는 ‘효율성’은 가장 나중에, 진단이나 치료를 잘할 수 있는지 하는 ‘효과성’도 뒤에 따질 수 있으나, ‘안전성’만큼은 철저하게 판단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안전성이 증명된 것만 규제 완화 대상이라 강변하지만,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런 기기가 있기는 한지 실례를 들어달라. 원격의료나 인공지능 진단이 오진 없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의료기기 규제 완화를 처음 꺼낸 것이 우연은 아닐 터, 이 정책을 교정하기 위해서라도 출발점이자 바탕인 신자유주의적 혁신성장론 자체를 혁신해야 한다. 성장과 일자리, 또는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하는 무차별적 규제 완화가 어떻게 혁신인가? 진입 장벽을 없애고 우버 택시를 허용하면, 인터넷 은행을 더 많이 만들면, 골목 곳곳에 프랜차이즈 드러그스토어가 들어서면, 어떤 경제가 어떻게 성장하나? 일자리는? 어떤 편리함과 효용이 늘어나는가?
실사구시를 강조한다. 말로만 혁신을 주장하지 말고, 성장과 일자리와 편익의 결과로 혁신을 실증하라. 나는 공정경제와 지식 기반의 제조업에 혁신 잠재력이 크다는 일부 전문가의 논증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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