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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01 18:04 수정 : 2018.08.02 15:36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현대 중국에 관한 강의에서 공산당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지도한다”고 헌법에 명기되어 있을 정도로, 당과 국가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지난 학기에도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공산당은 독재와 등치된 지 오래고, 중국의 정치적 후진성을 증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날 즈음엔 표정들이 복잡해졌다. 9천만 공산당원 가운데 13억 인구의 명운을 좌우할 지도자가 결정되는 과정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시진핑 역시 입당 후 국가주석이 되기까지 40년간 16개의 직책을 거쳤고, 1억5천만 인구를 통치했다. 적어도 무식과 호색이 도를 넘은 정치가는 가려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그렇다고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의 적폐를 심판할 외부가 없으니 전횡과 독단을 막기란 어려워 보인다. 최근에도 불량 백신 사태에 따른 저항이 거세지만, 당과 정부는 관련자 일부만 본보기로 처벌하고, 분노가 체제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지 않도록 통제에 주력할 공산이 크다.

사실 학생들이 공산당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은 민주주의를 내세운 다른 나라들의 사정 또한 지리멸렬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비민주’를 곧잘 비난하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통해 부동산 재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전미총기협회는 합법적 부패나 다름없는 로비로 국회를 주무르고, 교사들은 “신이 축복하는 아메리카”에서 생존을 위해 총기 사용 훈련을 받고 있다.

<탈정치 시대의 정치>에서 왕후이가 중국의 일당제든 서구의 다당제든 탈정치화 흐름에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당의 대표성이 모호해졌다는 측면에서건, 국가의 공공정책 결정이 자본의 이익에 따라 좌우된다는 측면에서건, 현재의 세계를 대표하는 양대 정치체제는 전례 없이 일치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양당제와 덴마크의 다당제가 “서구의 다당제”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선 곤란하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를 실시하는 미국, 영국, 한국, 일본과 달리,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은 각 정당이 얻은 표에 비례해서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일찌감치 도입했다. 삶의 질이 높기로 유명한 이들 나라에서 소수 정당은 어느 정도 의석수를 확보하여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류 정당도 과반 의석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여러 정당과 경쟁하고 타협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상대를 헐뜯는 것만으로 제 위치를 보전할 수 있는 양당제하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사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례대표제를 ‘무늬만’ 시행해온 한국에서도 선관위와 시민단체, 진보정당이 줄곧 제기한 사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전 당론으로, 후보 공약으로, 당선 이후 국정과제로 포함시킨 사안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오랫동안 주장해온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계기로 선거법 개혁 논의가 다시 점화되는 분위기다. 나의 몇몇 중국 친구는 영화 <1987>과 촛불시위에 애착을 갖고 있다. 한 친구는 저항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낸 사람들의 미소가 아름답고 부러웠다고 말한다. 이 성취가 배반당한 순간에 대해, 역사란 기껏해야 도돌이표에 불과하다는 정치적 무력감에 대해 그와 얘기하고 싶진 않았다.

기득권층이 된 민주당이 침묵하고, 인물정치에 특화된 미디어가 외면한 정치구조 개혁을 이제는 제대로 불을 지피면 좋겠다. 인간 노회찬에 대한 그리움을 딛고, 그가 정말 바꾸고 싶어했던 시스템에 대해 토론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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