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16 17:56
수정 : 2018.08.17 10:30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문재인 정부의 성장정책이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최저임금 인상’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새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게 유행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 성장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그것은 직접 성장을 추동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의 규칙에 관한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 하청업체 쥐어짜기, 프랜차이즈 갑질, 부당 내부거래와 사익 편취 등은 게임의 규칙을 갖추는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쌓인 문제들이다. 그 결과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약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의 몫은 줄어들었고, 이러한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규칙을 정비하는 데 소홀했다.
역대 정부도 문제만 인식했을 뿐 시장원리라는 교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시장이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시장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다르다. 시장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정한 다양한 규칙하에서 돌아간다. 시장은 의욕과 능력을 가진 자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지만, 이미 성과를 얻은 자에게는 경제력을 남용할 유혹을 제공한다.
시장 자체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기업은 더 이상 힘든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 비용을 쥐어짜고, 잠재적인 경쟁을 차단하고, 때로는 위협을 가하면서 시장을 장악해나간다. 하지만 잠재력을 갖춘 도전자가 기성의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 시장의 활력이 살아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게 정비되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으로 대표되는 지난 1년간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은 경제력의 남용을 억제하고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뜻에서 ‘소득주도 1.0’ 정도의 명칭을 붙일 수 있다고 본다. 시작 단계라 아직 내용이 풍부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면 ‘소득주도 2.0’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본격적인 성장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더 필요하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는 시장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이 받쳐주어야 하며, 그 토대 위에 재정정책과 산업정책에 집중해야 한다. 단, 정부가 해야 할 일과 민간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혹여 민간이 알아서 잘하는 사업에 숟가락을 얹는 방식이라면 곤란하다. 그냥 이런 걸 혁신성장이라고 부르면서 소득주도 성장을 폄훼하고 정책담론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국가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주도권 싸움에 불과하다.
물론 소득주도 성장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주체 대부분이 경쟁에서 탈락하여 의욕을 잃고, 불평등 심화와 인구 감소가 사회 전체의 유효수요 부족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계속 밀고 나갈 가치가 있는 정책이다. 정부가 기업을 찔끔 도와주는 기존의 방식에 머무르지 말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장기적으로 공급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로조건의 개선, 획기적인 출산 대책,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공서비스 확대, 지역 균형발전, 의료·교육·돌봄 서비스 산업의 고도화, 중소기업을 위한 산학협력 시스템 구축 등이 그것이다. 다행히 세금이 잘 걷히고 있지만 세수 증가분을 뛰어넘는 재정 확대가 필요하며 약간의 증세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다.
재정 확대 없는 소득주도 성장을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수많은 정책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인구 감소에 따른 저성장의 기본 추세를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어떤 성장론을 들고나오더라도 장기침체를 막을 방안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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