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28 18:21
수정 : 2018.10.28 19:00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예방하지 않거나 적절한 구조를 통해 인명피해를 최소화하지 못하면 사고는 재난이 되고, 책임 은폐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는 재난을 참사로 만든다. 피해가족들은 재난 대응 상황에 대해 충분한 정보와 필요한 지원을 제공받으면서 정부를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가족들의 생명과 지원을 놓고 구걸해야 했고 흥정해야 했다. 피해자들은 무기력한 피해자로 남아 모든 고통을 감내하거나, 분노와 불신을 딛고 투쟁을 통해 권리를 하나씩 쟁취해야 했다. 얼마 전 남동공단 화재 시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와 비좁은 합동분향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사태의 장기화가 우려된다는 관련 공무원의 인터뷰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국제구호기구간 조정기관(IASC)의 2011년 ‘자연재난 상황에서의 사람의 보호에 관한 운영지침’은 ‘최대한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진행 중이거나 계획된 지원과 조치, 법상 피해자의 권리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지침은 또한 피해자들의 의견 개진, 재난대응의 단계별 계획 수립 및 이행 참여, 피해자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메커니즘 마련, 피해자의 권리 실현을 위한 평화적 집회 개최 및 단체 결성 기회 보장 등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은 세월호 집회와 관련하여 유엔으로부터 ‘(정부의) 책임성과 투명성에 대한 요구를 정부 자체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와 동일시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했다.
유엔국제법위원회(ILC)의 2016년 ‘재난 상황에서의 사람의 보호’ 보고서는 재난대응에서의 인도적 원칙으로 인류애, 중립성, 공정성, 차별금지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인류애의 원칙은 ‘인간의 고통은 그것이 발견되는 곳마다 다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중립성의 원칙은 피해자들의 이해가 일차적인 고려가 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공정성의 원칙과 차별금지의 원칙은 특별히 취약한 이들에 대한 고려를 강조한다. 진상조사위원회(일본), 배보상위원회(미국)에 피해자를 포함시킨 예를 보더라도 형식적 중립을 강조하며 피해자를 객관적일 수 없는 단순한 “이해당사자”로 바라보는 것은 재난대응의 원칙일 수 없다.
4·16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정부건 기업이건, 전 정권이건 현 정권이건 관련 정보를 모두 제대로 공개한 곳은 없다. 2014년 검찰이 애초 약속했던 참사의 전 과정에 걸친 모든 관련자 및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 중 상당 부분은 수사 중간에 실종됐다. 2017년 국정원 개혁위원회는 열람만이 허용된 국정원 제공 자료만을 근거로 세월호와 국정원의 관련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국정원에 면죄부를 줬다.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관련해 2011년 이전에 본사 등에 어떤 정책과 자료가 있었는지 제대로 밝힌 바 없고, 에스케이(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은 자신의 생산품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음에도 사과 한 번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만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 개시를 결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과 안전에 관한 국가의 책임은 무한책임”이라는 구호성 외침이 아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피해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 이것이 사고를 재난으로, 재난을 참사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재난 피해자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국가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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