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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1 18:18 수정 : 2018.11.22 13:22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번 학기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는 학생들과 함께 한국의 반(反)빈곤 활동가들을 인터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홈리스 자원활동, 지역공동체 운동 등 한국 사회 빈곤과 다양한 방식으로 싸워온 분들의 삶을 듣고 기록하는 시간이다. 이달 초, 나와 학생들은 서울 성동구 논골신협을 찾았다. 고층아파트가 숲을 이룬 곳에서 다큐 <행당동 사람들>이 담아낸 1990년대 재개발 철거투쟁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지만, 몫 없는 사람들의 자조조직으로 출발했던 신용협동조합은 제 역사를 약간의 자료사진으로 남겨두긴 했다.

논골신협 이사장인 유영우씨는 한때 이 지역의 철거민 세입자였다. 동네가 재개발이 된다니 별수 없이 떠날 준비를 하던 차에 “집사람이 어디 가서 권리라는 얘기를 듣고” 왔단다. 처음엔 세입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냐고 되물었지만, 여러 모임과 집회를 거치면서 권리를 제 삶의 언어로 습득했다. 행당동 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3년 피 터지게 싸우고” 가이주단지에 입주하게 되었을 때, 7~8평짜리 집집마다 불빛이 켜지던 순간을 그는 생생히 되짚었다. 국일고시원 화재가 발생한 이튿날 진행된 인터뷰이기도 해서 “주거는 기본권”이라는 그의 주장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권리는 분명 이십여년 전 한 주민 지도자가 목숨을 걸고 움켜쥔 언어였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권리가 희소재이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권리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사회권, 주거권, 수급권, 복지권, 노동권, 휴식권, 행복권, 장애인 이동권, 성적 자기결정권, 청소년 참정권, 학습권, 환경권, 동물권, 낙태권 등 다양한 권리 요구가 새롭게 등장하고, 분화하고, 각축을 벌이는 사회가 되었다. “누구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세계인권선언 19조가 바야흐로 대한민국 시민 개개인의 행동강령이 된 역사적 순간인가? ‘권리들’의 사회가 되다 보니 제 자신을 ‘피해자’나 ‘당사자’로 용기 있게 선언하는 시민도 많아졌다. 국회에 대한 신망을 거둔 지 오래고, 대의민주주의의 호흡이 너무 느리다고 불평하는 시민들에게 청와대는 ‘즉각민주주의’로 화답했다. 30만건 이상의 다채로운 이슈가 국민청원 게시판을 뒤덮었고,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를 본떠 신문고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 나열한 권리들 모두 혹독한 싸움을 거쳐 쟁취한 값진 성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청원이든 시위든, 제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가 ‘피해자-되기’를 선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또 다른 낙인을 감당해야 하고,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국일고시원 화재는 ‘피해자’ 선언조차 어느 정도의 교육자본이나 사회자본을 요구하는 게 아닌지 되묻고 있다. 권리 넘치는 사회의 풍경과 대조적으로, 이 화재의 당사자들은 너무나 조용하다. 사망자는 대부분 고령의 일용직 노동자였다. 일부는 죽어서야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과 재회했고, 일부는 찾는 가족이 없어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살아서 제 권리를 외쳐본 적 없는 주검들을 대신해 사회가 고시원의 민낯을 해부하고, 주거권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야 사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90년대 초 유영우씨가 권리 언어와 만났던 벅찬 순간을 2018년 국일고시원의 체류자들이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삶이 가장 비극적이라 생각하는 수많은 피해자가 권리 수호를 위해 온라인에서 혈투를 치르는 동안, 어떤 피해자는 권리들의 사회 바깥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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