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06 18:26
수정 : 2018.12.07 10:10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지난달 22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과 한국경제의 미래’라는 주제로 정책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부 주제는 금융개혁, 재벌개혁, 조세개혁이었다. 그런데 금융개혁 방안을 제시하려던 홍익대 전성인 교수의 발표가 주최기관인 케이디아이에 의해 돌연 취소되었다. 전날 밤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한다.
전 교수가 발표하려던 글에는 금융정책 및 금융감독 체계의 개편 방안이 들어 있었다. 금융위원회를 해체하고, 현재 금융위가 맡고 있는 금융정책 업무를 기획재정부로 옮기며, 금융감독에 대해서는 독립성이 강화된 새로운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 금융위가 금융산업 정책과 금융감독 정책을 동시에 관장하면서 사실상 금융감독원을 지배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기 때문에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수년 전부터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공론화된 바 있다. 그런데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출범한 새 정부가 이렇다 할 금융개혁 조처를 내놓지 않자 전 교수가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전 교수는 금융위를 해체하는 구체적인 실행 과정에서 위원장은 사임하고 부위원장은 민간위원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케이디아이가 발표를 취소한 것은 특정인의 거취를 언급하는 등 전 교수가 너무 나간 주장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으로서의 부담감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정책 전환을 위해 어떤 공공기관을 해체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기관의 장이 사임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금융위와 금감원 간의 수직적 위계질서하에서는 금융의 안정성과 건전성 유지에 주력해야 하는 금융감독 본래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시스템은 기형적인 구조이다. 원래 금융산업 정책은 규제완화와 효율성을, 금융감독 정책은 안정성과 건전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 업무의 속성상 서로 충돌하기 쉽기 때문에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
금융업은 일종의 규제산업인데다 소위 금융인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첨단 금융지식을 공유하는 ‘금융인으로서의 동류의식’이 형성되므로 금융관료와 금융회사 임직원의 결탁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금융을 전공한 학자들도 상당수 이 대열에 합류해 있다. 견제 장치를 도입하지 않으면 정책당국, 감독당국, 금융회사 간의 폐쇄구조가 고착되어 한국 특유의 관치금융 관행을 근절할 길이 요원하다.
같은 날 세미나에서 재벌개혁에 대한 발표는 취소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됐다. 발제를 맡은 서울대 박상인 교수는 경제력 집중 해소를 위해 계열사에서 출자를 받은 계열사는 다른 계열사에 출자를 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자를 2층 구조로 단순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재벌기업들의 확장을 강력하게 막아야 독립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박 교수의 재벌개혁안은 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 면에서 전 교수의 금융개혁안보다 훨씬 도전적이다. 사실 금융개혁은 노동개혁이나 재벌개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한 과제이며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관치금융 근절과 금융개혁 방안을 오래 고민해온 전 교수는 구체적인 실행방안까지 제시하며 학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케이디아이는 그 상상력을 꺾었다.
이 정도의 제안이 세미나 단계에서 제동이 걸린다면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진심으로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원한다면 곳곳에서 더 날카로운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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