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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16 18:26 수정 : 2018.12.17 13:58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가짜뉴스의 해악을 성토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쓸모 덕이다. 가짜뉴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사라질 리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최소한 가짜뉴스의 해악을 관리하고 확산을 통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짜뉴스의 쓸모, 그러니까 그것을 ‘누가 왜 필요로 하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가짜뉴스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쓸모를 생산과 소비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생산자에게 가짜뉴스는 어떤 이익을 가져온다. 정치인은 정적에게 타격을 가하고(흑색선전) 자신의 실책을 덮거나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꾸며낸다. 언론인은 시청률이나 기사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가짜뉴스를 지어낸다. 경제 행위자는 경쟁자를 제거하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가짜뉴스를 날조한다.

소비자에게도 가짜뉴스는 쓸모가 있다. 가령 흥미와 재미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에게 사실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흥미롭고 재미있으면 만사 오케이, 그것이 미워하는 정치인이나 셀러브리티를 조롱하고 치부를 폭로하는 것이라면 더 좋다.

가짜뉴스는 또한 ‘우리’의 경계를 명확히 해준다. 북으로 보낸 귤 상자에 돈을 넣었을 리 없지만, 그러한 의혹을 공공연하게 거짓이라 말하는 자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 너희는 우리 편이 아니다.

무엇보다 가짜뉴스는 일상에서 느끼는 혼란을 중요 사안으로 다루고 익숙한 설명도 제공한다. 평생 북한과 종북세력을 ‘원쑤’로 생각했고, 얼굴이 하얗지 않은 외국인을 미개한 원시인이나 잠재적 범죄자로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은 평화의 파트너가 되었고, 외국인을 차별하면 안 된단다. 혼란스럽지 않았던 시절에도 불안과 공포가 없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원수와 막 대해도 되는 원시인과 경계할 범죄자가 누구인지 알았기에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도 어엿한 사람이 되었다. 혼란스럽다. 원수와 원시인과 범죄자는 그 자체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는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다. 그러면 우리는 대체 누구지?

가짜뉴스는 혼란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온갖 재난의 배후에는 북한과 종북세력이 있으며, 거무칙칙한 외국인은 원시인이고, 착하고 가련한 척하는 난민들은 돈벌레이거나 잠재적 테러범이란다. 미심쩍기도 하지만 익숙하고 마음에 드니 상관없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적을 다시 소환하고, 함부로 대할 원시인과 경계할 범죄자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뉴스는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원수는 박멸하면 되고, 원시인은 기어오르지 못하게 거칠게 다루면 되고, 범죄자는 집안에 들이지 않으면 된다. 간명하고 익숙하며 마음에 드는 문제 진단과 해결책이다. 가짜뉴스를 믿지는 않더라도 좇을 이유가 많다.

보통 가짜뉴스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지능이나 재주의 차이로 구분한다. 거짓 정보를 날조하여 이익을 취하는 영리한 악당과 거짓 정보에 현혹되어 그따위를 믿는 멍청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짜뉴스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쓸모를 고려하면 그러한 통념을 따를 수 없다. 가짜뉴스를 믿지 않으면서도 흥미와 재미를 얻고자, 피아를 식별하고자, 익숙한 방식으로 혼란을 정리하고자 좇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를 믿는 것과 좇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믿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좇는 사람은 변할 여지가 있다. 가짜뉴스를 좇지 않을 이유를 밝히고 계기를 마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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