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06 18:43
수정 : 2019.01.07 14:08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나는 평생 소신투표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했다. 1등만을 뽑는 단순소선거구제에서 내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몇차례 최악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차악으로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차악 투표’ 시대는 끝나야 한다. 국민에게 신념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현행 선거제도는 거대정당에 절대 유리한 승자독식제도다. 이 선거제도는 과도한 사표로 민의를 왜곡하고,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를 정착시켰다. 현재의 여당, 즉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수구야당보다는 ‘진보적’이지만, 국제적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정당이다. 그들은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지만, 과도한 시장주의와 민영화로 ‘자본독재’를 키웠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다. 군사독재의 후계 정당과 자본독재의 후견 정당이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통해 영원히 과두지배하는 정치구도가 오늘날 ‘한국의 비극’을 낳은 근본원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행 선거법은 적폐 중의 적폐다. 이것은 적폐청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적폐이며,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는 핵심적인 적폐다. 선거법은 정치지형을 수구와 보수의 독무대로 만들고, 새 정치세력의 등장을 원천봉쇄하며, 젊은 세대의 발랄한 정치적 상상력을 말살한다. 선거법 개정이 없는 한 기득권 양대 정당의 과두지배체제를 극복할 수 없고,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기대할 수 없다.
선거법이 최악의 적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한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지금도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 그의 신념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문제가 선거법 개정의 최대 난제로 떠올랐다. 의원 수를 늘리는 데 회의적인 ‘국민 여론’을 앞세워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는 것은 비겁하다. 국민 여론이 국제적 기준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1인이 ‘대의’하는 국민 수는 스웨덴이 3만명, 영국이 5만명인 데 비해 한국은 무려 17만명이다. 다시 말해 스웨덴에 비해 5배, 영국에 비해 3배의 국회의원이 모자란다.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국회의원, 검소하고 특권의식이 없는 국회의원이 스웨덴 민주주의를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로 발전시킨 요인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국회의원이 많을수록, 그들의 특권이 적을수록 민주주의는 더 성숙한다. 우리는 그 반대다. 국회의원 수는 너무 적고, 이들의 특권은 너무 많다. 국제적 표준에 접근하려면 국회의원 수를 2배 정도는 늘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국회의원 수를 500명(지역구 250, 비례 250) 정도로 늘리고, 그들의 특권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 정답이다. 유능하고 검소한 국회의원이 공짜로 2배 는다는데 어느 국민이 반대하겠는가.
선거법 개정의 열쇠는 더불어민주당이 쥐고 있다.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천재일우의 역사적 기회가 민주당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민주당은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촛불시민들과 함께 성숙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갈 것인지, 수구세력과 손잡고 알량한 기득권을 지켜갈 것인지 역사가 지켜볼 것이다. 선거법 개정은 한국 사회가 성숙한 민주사회로 도약할지, 야만적인 과두지배의 정글로 전락할지를 판가름할 정치적 분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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