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08 18:01
수정 : 2019.01.09 09:41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2016년 일본 참의원 선거 당시의 이야기다. 고베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작한 포스터가 화제였다. 젊은 여성이 앞을 똑바로 보고 있는 사진 아래 “18살을 깔보지 마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중장년 남성 일색의 선거문화에 경종을 울린 진취적인 포스터로 호평을 받았다 한다. 한국에서도 2018년 지방선거 때 포스터가 큰 주목을 받은 일이 있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녹색당 신지예 후보가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앞을 응시하는 포스터였는데, 화제의 양상이 좀 달랐다. 서울 곳곳에서 벽보가 훼손되었고, 분노 어린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오히려 젊은 여성들의 지지가 모였고 신 후보는 8만2천여표를 얻었다.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문제라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상황은 모두 나쁘다. 국제의원연맹 회원국 190개국 중 일본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0.1%로 158위여서, 한국보다 한참 낮다. 하지만 일본은 최근 몇년간 청소년과 여성의 정치 참여와 관련해 획기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변화는 선거권 연령 하향으로 시작되었다. 2015년 일본은 선거권 연령을 20살에서 18살로 낮췄다. 이로써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유일하게 19살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국가가 되었다.
연령 하향 그 자체보다도 그로 인해 공론장 자체가 달라진 게 가장 큰 변화였다. 선거권 연령 하향 관련 토론은 대부분 청소년 참정권의 장단점에 맞춰진다. 단점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청소년의 판단능력과 공교육의 정치화를 우려하고, 토론을 빙자해 청소년 혐오에 가까운 발언들이 공론장을 점령하기 일쑤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개정 이후 일본의 논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선거권 연령 하향 이후 처음 실시된 2016년 7월, 24회 참의원 선거에서 10대의 투표율은 51.3%로 20~30대보다 높았다. 투표권을 손에 든 백만명에게 그걸 다시 박탈하자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지금 일본에서 청소년 참정권의 주요 토론 주제는 ‘주권자 교육 방법론’이다. 공론장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2015년을 기점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2016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여성 후보인 고이케 유리코가 당선된 것이다. 일본에서 여성 도지사의 탄생은 직선제가 실시된 이래 최초로, 69년 만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당선 가능성 유무는 둘째 치고 후보마저 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2018년 동수제를 기반으로 한 성평등 개헌을 논의했으나 개헌 자체가 어려워졌으니 앞으로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일본에서는 2018년에 여성과 남성 의원 후보자 비율을 동등하게 맞추는 일본판 ‘파리테’(프랑스식 동수제)가 만장일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물론 선거권 연령을 하향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가 늘어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고이케 유리코는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도문 작성을 거부할 정도의 극우 인사이다. 극우에 관심을 가진 젊은 층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여성과 청소년의 정치 참여 확대는 그 자체로 특정 진영의 유불리로 계산할 수 없다. 급진좌파 페미니스트부터 극우 민족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지닌 이들이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더 많은 이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것, 과소대표 되었던 여성들이 더 많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진보적 가치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가 보장될 때 가능하고, 민주주의의 정치적 효능감은 공론장의 수준이 달라질 때 경험될 수 있다. 선거권 연령 하향과 성평등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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