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15 17:22
수정 : 2019.01.15 19:35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새해의 설렘이 있을 법도 한데, 올해 경제 전망은 싸늘하기만 하다. ‘경제위기’라는 설익은 나팔을 불 때는 아니지만, 세계 경제가 완만한 계단이 아니라 가파른 사다리를 올라야 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라는 다소 음습한 문학적 표현까지 동원했다. 당연히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정책적 묘안에 대한 고민도 많다. 정치 상황이 가시밭인 나라에서는 감정적인 갑론을박도 따를 것이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돌부리에 걸려 주춤하다 다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실증연구에 따르면, 한번 실직하면 또다시 실직할 위험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니 실직 경험자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은 오랫동안 현저히 떨어진다. 인생역전은 힘들다.
더 넓게 보자면, 실업은 노동자의 숙련과 경험을 잠식하여 경제의 잠재생산력을 줄이고 노동소득 감소를 통해 총수요도 줄인다. 이렇게 잠식된 경제는 역시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게다가 실직의 정치·사회적 효과도 무시 못할 정도다. 실업은 이혼율과 범죄율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키며, 노동자의 사망률을 높인다는 연구도 있다. 실직의 영향은 이렇게 장기적이고 포괄적이다. 돌부리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개울 위 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에 가깝다. 경제위기를 통해 큰 비용을 치르고 새삼 깨달은 교훈이다. 이런 효과를 고려하지 못해 그간 정책 반응이 소극적이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일자리는 당장 손에 쥐게 되는 노동보상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이 주목했듯이, 일자리에는 ‘외부효과’가 있기 때문에 일자리의 ‘사회적’ 가치는 시장에서 흔히 보상되는 ‘사적’ 가치보다 크다. 소득분배 연구의 대가인 토니 앳킨슨은 한발 더 나가서 일자리는 교육과 건강과 같은 ‘가치재’라고 했다.
따라서 사적 가치의 논리에만 맡기면, 일자리의 양과 질이 사회적 필요 수준보다 못할 수 있다. 일자리의 구조적 부족 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고, 적극적인 일자리 정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예컨대, 귀한 나라살림 일부를 떼어 기업이나 개인에게 고용보조금을 주면서 일자리를 늘리거나 유지하도록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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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11일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 앞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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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이 강한 분야에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필요하다. 공공부문이 나서면 민간부문이 위축된다는 걱정도 있지만, 일자리의 ‘공공성’이 명확한 곳에 정책을 집중하면 해결될 문제다. 오히려 공공성이 강한 곳을 민간 경쟁에 맡기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더 많다. 민간부문의 ‘주연’ 역할만큼, 공공부문의 ‘마중물’ 역할도 중요하다. 상충관계로 볼 일만은 아니다.
한국 공공부문의 고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비해 아주 낮은 수준이다. 공기업을 고려해도 마찬가지다. 복지서비스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요구는 급증하고 있는데, 이런 서비스를 전달하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직업 공무원’의 과잉을 경계하는 만큼, 발로 뛰는 ‘공공서비스 제공자’의 과소도 걱정해야 한다. 제대로 된 환경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 가능성도 높다. 공공부문을 개혁하고 과감하게 사회적 투자를 확충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당대의 서예가였던 장일순 선생에게 어린 학생이 붓글씨를 배웠는데,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획수가 제각각인 글자를 똑같은 크기로 쓴다고 애먹었다. 그때 선생이 그랬단다. “획수가 많은 것은 크게 쓰고 적은 것은 작게 써도 된다.” 그 학생은 마치 개안한 듯했다고 한다. 이런 열린 마음으로, 공공부문에 어떤 일자리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다.
※2019년 1월16일치부터 이상헌 ILO 고용정책국장이 ‘세상읽기’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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