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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9 17:41 수정 : 2019.02.20 09:25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신의 힘보다는 이성의 힘을 믿었던 당대의 천재 버트런드 러셀은 세계 2차대전 중에 ‘지적 쓰레기’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의 증거를 부지런히 찾고자 했다. …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끊임없이 추락하는 광기의 세상이었다.” 곧이어 그는 지식이라는 허울 속에서 펼쳐지는 어리석음의 향연을 꼼꼼하게 고발했다. 오늘 나는 그의 글을 다시 읽는다.

미국 의회가 멕시코 국경 장벽을 짓는 돈을 주지 않자, 그 나라의 지도자는 정부 폐쇄를 선언하고 골프를 치러 가버렸다. 진짜배기 나랏일을 하던 노동자들은 졸지에 ‘일시 해고’ 상태에 놓였다.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핵심 부처의 장관이 돕는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려운 건 안다. 하지만 솔직히 이해하진 못하겠다. 앞으로 나올 월급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으면 될 것 아닌가.” 그의 재산은 30억달러에 달한다. 미국 국민의 40%는 400달러의 급전도 조달하지 못할 정도로 아슬하게 산다.

대서양 반대편에 있는 어느 나라의 총리는 이민자들이 싫다. 몰래 들어오기도 하고 기업의 필요에 따라 오기도 하는데, 이유야 어떻든 간에 무슬림이 문제란다. 이런 ‘당당한 증오’가 그의 정치적 자산이다. 그가 내세운 대책은 인구를 늘려 이민자가 필요 없게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그는 4명 이상의 자녀를 낳는 여성에게 소득세를 영구 면제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192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여성들의 ‘출산 전쟁’을 독려하면서 각종 지원책을 약속한 적이 있다. 자녀가 10명 이상인 가족에 대한 소득세 영구 면제도 포함되었다. 소득세 면세점이 자녀 10명에서 4명으로 줄어든 것이 지난 100년의 성과다.

당당한 어리석음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라 경제를 늘 걱정하며 임금협상이나 최저임금을 거칠게 비판했던 어느 일등신문사의 노조는 “현재 임금으로는 취재 전념 불가”하다며 투쟁을 선언했다. 저쪽의 임금 인상은 나라를 망치고, 이쪽의 임금 인상은 생산력 향상의 불쏘시개라는 것이다. ‘막돼먹은 노동’과 ‘신성한 노동’의 구분은 여전하다. 어느 일등대학은 노동자 파업으로 도서관의 난방이 중지되자 학습권을 주장했다. 일등학생의 학습은 쉽사리 ‘신성한 권리’가 되고, 평범한 노동의 권리는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이 된다.

이런 세상 구분법 속에서 노동의 단체행동은 사시나무 떨듯 분노할 일이지만, 기업의 ‘단체행동’은 관용의 대상이다. 몰래 뭉치고 담합하고 법을 뒤틀고 시장지배력을 높여도 세상은 고요하다. 괜한 꼬투리 잡았다가 곤란해지는 걸 두려워하는데, 그 곤란함은 종종 “경제성장”과 “고용”이라는 ‘이성적’ 논리로 포장된다. “노동자들의 단합에 관해서는 자주 듣게 되지만 고용주들의 연합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연합이… 평소의, 그리고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한 말이다. 시장경제에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삼라만상을 알고 가르쳤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의 치아 개수가 남자보다 적다고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가 왜 아내에게 직접 묻고 확인하지 않았는지 물으며 분노했다. 결혼도 두번이나 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가. 그 이후로도 세상은 더디게만 바뀐다. 말할 힘을 가진 자가 말하기 전에 ‘저쪽의 사정’을 한번만 물어만 봐달라는 초조한 바람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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