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6 18:06
수정 : 2019.02.27 09:34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소유한 재산의 가치를 스스로 매기고, 재산세의 부과나 거래의 집행도 그 가치에 따라 이뤄지도록 의무화한 곳이 있다고 하자. 살고 있는 집이 5억원의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면서도, 즉 5억원 밑으로는 팔지 않을 것이면서도, 재산세를 덜 부담하기 위해 누군가 그 가치를 2억원으로 평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재산세율이 2%라면, 세금은 1천만원이 아니라 400만원만 내면 된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재산이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고 거래가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일종의 경매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제시된 가격대로 지급하겠다는 사람이 나서면, 재산을 언제라도 넘겨야 한다. 이 사람은 600만원의 세금을 아끼는 대신, 3억원의 손해를 보며 집을 내줘야 하는 소탐대실의 선택을 한 셈이다.
이곳에서의 자원배분 규칙, 곧 자기평가에 기초한 재산과세 및 재산교환 방식은 지금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선호를 감출수록 손해가 커지고, 재산의 경우 가장 높은 가치를 얻는 사람들에게 옮겨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세상이 현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에릭 포즈너와 글렌 웨일의 공저인 <급진적 시장: 공정한 사회를 위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근본적 개혁>에만 등장할 따름이다.
이곳은 시장 배분의 기본 원칙들이 모두 발현되는 ‘급진적 시장’이다. 모든 진입자들에게 열려 있고, 경쟁에 따라 규율이 이뤄지며, 교환이 자유롭게 이뤄진다. 경제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정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존할 필요성이 줄어들며, 자발적인 세원 노출로 조세수입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공공서비스의 품질이 크게 개선되거나 기본소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 갈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누군가 찾아와 돈다발을 내밀며 이 집의 소유권은 더 이상 당신에게 있지 않다며 내쫓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기다릴 수도 있다. 재산을 ‘자유의 보루’이자 인간을 책임 있고 분투하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신성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곳은 불공정할 뿐 아니라 비인간적인 세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재산권에 대한 제약은 공동선의 달성은 물론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저자들의 입장이다. 이들에 따르면, 19세기 사회주의자 피에르 프루동의 고발과 달리 “재산은 도둑질”이 아니지만,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초석을 쌓은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의 지적처럼 “재산은 독점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재산이 배타적 소유물의 지위를 벗어나 각자가 사회로부터 임대해 잠시 점유한 것으로 인식되면, 부가 보다 평등하게 분배될 뿐 아니라 부의 크기도 늘어날 것이다. 자본주의가 훼손했던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시민적 참여도 촉진할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좌와 우의 구분을 뛰어넘는다. 시장을 철저히 신뢰한다는 점에서는 우파이지만, 사유재산권의 보호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우파와 다르다. 평등을 중시하고 사회의 역할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좌파이지만, 관료나 엘리트의 동기나 능력에 회의적이라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좌파와 차이가 있다.
시장은 사회를 정돈하고 배열하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전제 위에 시장 배분의 원칙들을 현실에서 실제로 구현하려는 이들의 기획이, 인간 심리의 비합리성과 사회의 복잡성을 간과한 지적 유희라는 지적도 있지만, 경제와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존의 가정들을 뿌리부터 따져보며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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