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8 18:13
수정 : 2019.03.01 13:45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 교수는 금융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위기 발생 전인 2006년에 새로운 세제 도입을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불평등 연동세제’다. 불평등의 수준을 관리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세율을 조정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실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의 세후 소득불평등을 1979년 수준으로 되돌리려면 최고세율을 38%에서 75%로 올려야 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없다. 경제학은 때로 쓸모가 있는 학문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자 경제학자들은 근본적인 처방을 연구했고, 다각적인 검토 끝에 물가안정목표제라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한국도 이 제도를 받아들여 20년간 시행하고 있다.
이름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지만 실러가 생각해 낸 것은 불평등 목표제와 같은 것이다. 순진한 발상이라고 폄하될지 모르지만 불평등이 계속해서 문제가 된다면 언젠가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지난해 4분기 소득분배 통계를 두고 말이 많다. 소득주도성장의 역주행, 소득절망성장 같은 용어가 등장하면서 비판과 비난은 결국 최저임금 인상에 집중되고 말았다.
소득 하위 20%, 즉 1분위 가구에 소득이 없는 노령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설상가상 통계청의 표본조사 방식의 개편으로 그 비중은 더 올라갔다. 인구 감소에 의한 내수 부족과 과도한 경쟁으로 사업을 접은 자영업자가 1분위에 편입되는 비중도 올라가고 있으니, 시장소득 기준의 분배지표는 앞으로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설사 최저임금을 동결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기존의 소득분배지표는 정책의 목표나 참고자료로 삼기에 매우 부족해 보인다. 고령화라는 구조적 요인을 제거한 보조지표를 발표하고 활용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인가구와 비노인가구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을 규명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데 제대로 활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또한 노인가구에 대해서는 소득이 아닌 소비 기준의 분배지표를 따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 노인가구는 청장년가구와 달리 소득, 자산, 소비 간의 상관관계가 약하다. 소득은 없지만 모아놓은 자산을 헐어 쓰는 분도 있고, 통계에는 잘 잡히지 않는 사적인 이전소득에 의존하는 분도 적지 않다.
통계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 필요하면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기존의 실업률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자, 통계청은 2014년부터 구직을 단념한 사람이나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싶은 사람들까지 고려한 확장실업률을 따로 발표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목표제를 운용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자물가지수 대신 근원물가지수를 쓰고 있다. 농수산물과 원유 가격의 변동과 같이 중앙은행이 영향을 줄 수 없는 요인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소득분배에 관한 보조지표를 작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정해진 미래라고 할 수 있는 고령화 요인을 분리해서 현황을 파악하고 대중에게도 알리는 일은 정당하다. 이참에 논란이 많은 자영업자 통계도 따로 분리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 훗날(?)에 어느 나라든지 실러 교수가 제안한 불평등 연동세제를 도입한다면 견고한 분배지표부터 구비해야 할 것이다. 지표의 정확성에 시비가 붙으면 한발짝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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