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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10 17:54 수정 : 2019.03.11 09:23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오늘의 독일을 만든 것은 라인강의 기적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비극이다. 아데나워 수상이 이룩한 경제발전이 독일(서독)의 급속한 성장에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이 오늘날 유럽연합의 주도국으로서 경제적인 위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도덕적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나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 덕분이다.

독일의 현대사는 곧 아우슈비츠와의 대결의 역사다. “인간 존엄은 불가침하다”는 독일 헌법 제1조 속엔 아우슈비츠의 과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서려 있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국가로서 독일의 존재 이유는 ―‘독일인의 주권’이 아니라― ‘인간 존엄’을 수호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독일 국가정보기관의 이름이 ‘헌법수호청’인 것도 바이마르 헌법을 짓밟은 나치즘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독일의 교육도 아우슈비츠의 산물이다. ‘더 이상 아우슈비츠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쓰디쓴 각성이 오늘의 독일 교육을 만들었다. 사회 적응보다 권력 비판을 중시하는 독일의 ‘비판교육’은 학교를 민주주의의 실험실로 삼았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능력을 키우는 ‘저항권 교육’, 정치가의 거짓선동을 분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선동가 판별 교육’, 잘못된 권위에 굴종하거나 그릇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막는 ‘반권위주의 교육’이 독일인을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길러냈다.

독일 경제 기적의 숨은 공신인 ‘노사공동결정제’도 아우슈비츠의 ‘선물’이다. 노동이사와 주주이사가 50%씩 참여하여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 파격적인 제도는 본래 나치 청산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다. 독일의 대기업들이 히틀러 정권에 하릴없이 굴복하여 나치의 부역자로 전락한 역사적 경험이 노동자의 민주적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노사가 공유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일은 노동자의 경영참여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고, 그것이 독일 경제를 세계 최강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과거청산을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삼은 것이 독일을 ‘성숙’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부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 과거청산은 경제발전의 족쇄가 아니라 견인차였다.

독일이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나아간 반면, 대한민국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친일의 과거, 냉전반공주의의 과거, 군사독재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세력이 개헌, 선거법 개정, 한반도 평화 등 정부의 개혁정책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는 현실은 과거청산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2019년은 과거청산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는 새로운 세력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 지난 100년이 친일-냉전-독재 세력이 주류였던 시대였다면, 새로운 100년은 새로운 세력들이 각축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현재의 집권세력, 즉 민족-평화-민주 세력은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과거 세력을 정치의 무대에서 물리치고, 새로이 열린 공간에서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 평화를 승화한 ‘정의’, 민주를 실체화한 ‘복지’를 주창하는 미래 세력과 경쟁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100년은 새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독일은 아우슈비츠의 나라다. 비극적 과거에 대한 진지한 청산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아직 제주의 나라, 광주의 나라, 남영동의 나라가 아니다. 과거는 여전히 우리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100년의 문은 과거청산이라는 열쇠로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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