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5 16:32
수정 : 2019.03.25 19:17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그때 왜 그러셨어요?” 해직 언론인 최승호 감독은 출판 기념회를 마친 <문화방송>(MBC) 경영진을 쫓아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대답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감독은 그들이 벌인 잔치를 보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말을 한다. “잘들 산다, 잘들 살아.” 영화 <공범자들>의 시작이다. 엠비시와 <한국방송>(KBS)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계절을 몇개 넘어 마침내 승리해서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2012년 파업 참여로 해고되었던 최승호 감독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방송사의 시간은 바쁘게 돌아갔다. 파업 현장에서 보았던 얼굴들을 방송에서 볼 때마다 든든하다. 그런데 계약직 아나운서들의 해고 소식을 들었다. 2016년과 2017년에 뽑힌 계약직 아나운서 11명 중 9명이 노동위원회 구제신청에 나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회사는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해고의 고통을 아는 이들이 노동위원회 판정에도 불복하고 소송까지 불사한다니….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회사 논리는 간단했다. 계약직으로 뽑았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여느 회사의 인사부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아나운서들은 지상파 방송에서 유례없는 계약직으로 채용되었지만 선배들이나 타 방송사 아나운서들과 동일한 수준의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맡은 업무나 급여 역시 동일했고 회사의 필수 업무였다. 2016년 채용된 아나운서들은 갱신 절차 없이 인상된 연봉계약을 체결했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 속기록을 통해 정규직 전환 계획이 입증되었다. 노동위원회가 계약갱신권이 인정되는 해고로서 무효라는 판정을 내린 이유다.
노동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기본권이다. 이념과 상관없다. 물론 엠비시는 공정방송 실현이라는 과제 앞에 이를 악물고 있다. 지난 과거 아픔까지 청산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청산의 대상인가? 회사는 이들 외에 2012년 파업 기간 중 채용한 대체인력에 대해선 고용관계를 유지했다. 노동조합이 기자 등을 현업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 뽑았다고 문제 삼는 이들이었다. ‘모집 공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지원자도 무더기 합격했다’는 규탄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은 “대체인력과의 고용계약을 종료할 경우 혼란이 더 커질 것이 우려됐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정규직은 남겨두고 비정규직만 해고했다. 아나운서들은 대체인력이 아니었다. 파업과 관계없이 이전에 채용되었다. 단지 사측이 이용하기 좋은 계약직이라는 형식이었을 뿐이지만 피해는 그들에게만 집중되었다.
<한겨레>에 관련 기사가 실리자 적의에 가득 찬 댓글들이 달렸다. 선배들이 어려울 때 회사 편에 섰다는 죄명이다. 신분의 불안정은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박탈한다. 회사의 이전 사장들이 그들을 계약직으로 채용한 이유다. 파업에 동참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곳에 그들이 서 있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던 때였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촛불이 성공한 것은 광장에 나온 1700만명 때문만이 아니다. 가게를 비우지 못해 오지 못한, 먼 이국땅에서 마음으로 함께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냐는 질타는 정당하지 못하다. 위치를 고려하지 않은 비난은 옳지 않다. 자격을 따지는 민주주의는 옹색하다.
해고는 단순히 계약 관계의 종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당해고일 경우 마주하는 상실감은 생존권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연인의 배신만큼 좌절하고 트라우마는 오랜 기간 지속된다. 이 모든 과정을 최승호 사장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지인이 에스엔에스(SNS)에 글을 남겼다. “진보란 바로 그 고통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누군가가 반복해서 경험하지 않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 편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사장이 되는 일이 아니라 상식적인 일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청춘을, 전 재산을, 건강을, 관계의 파괴를 제물로 바치지 않아도 되는, 혹은 조금 덜 바쳐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보라 믿는다.” 힘없는 이들에게 과거의 책임을 전가하는 정의나 진보는 없다. 공존에는 품이 든다. 힘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여전히 회사를 사랑한다는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긴 해고의 길 끝 어디에서 최승호 사장님께 “잘들 산다, 잘들 살아”라고 자조하거나 “그때 왜 그러셨어요?”라고 묻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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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최승호 사장.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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