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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4 17:40 수정 : 2019.04.14 21:11

진도 팽목항 방파제세월호 참사 5주년을 엿새 앞둔 지난 1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19.4.14 진도/연합뉴스

“세상엔 ‘세월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 한 유가족의 탄식이다. 참담하지만 사실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 적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들이 세월호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냥 나쁘거나 이기적인 존재다. 남의 불행이 즐겁고 고소한 사람들 또는 남의 사정에 아랑곳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은, 바라건대 아주 소수일 것이기에 그냥 무시하자.

둘째, 세월호를 걸림돌로 여기는 집단이다. 재난에 책임이 있는 자들, 그것을 애써 은폐하고 왜곡한 자들, 그에 협력한 자들. 이들의 공통점은 네 가지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을 것, 은폐할 권력이 있을 것, 왜곡할 수단을 지닐 것. 마지막으로 세월호를 파헤치면 큰 손해를 입을 것. 직업으로 보면 정치인, 공무원, 전문가, 언론인 또는 ‘기레기’가 그에 속한다. 숫자로 보면 그리 많지 않을 테지만 무시할 수 없다.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알량한 이익과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껏 노력한다. 그 결과가 세월호 관련 가짜뉴스다. 그것은 세번째 집단을 조준한다.

셋째, 견해를 바꾼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들도 참사가 일어났을 때 크게 놀라고 유가족과 함께 슬퍼하고 그런 재난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견해를 바꾸었다. 그들과 뭔가를 나누자니 괜스레 억울하고 아깝기도 하다는 얄팍한 계산이 설마 작용했을까. 아무튼 ‘이제 지긋지긋해. 불쌍하지만 보상금도 많이 챙겼잖아. 혹시 그 뒤에 누군가 있는 거 아냐?’

그러한 변화의 이유를 가짜뉴스에서 찾는 건 나태한 설명이다. 물론 어떤 역할을 했겠지. 가령 최근 5·18 유공자를 “괴물집단”이라 불렀던 제1야당의 국회의원은 예전에 세월호 피해자를 “거지근성”으로 “시체장사” 하는 “종북주의자”라고 칭했다. 그의 참혹하고 처참한 배포에 아연실색이지만 다음을 짚어야만 한다. 그와 동료들이 배설한 가짜뉴스는 의견을 바꾼 사람들의 심중에 있던 말일 수 있다. 가짜뉴스가 그러한 생각을 일깨운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가짜뉴스를 빌미로 표출된 것일 수 있다.

가짜뉴스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에 공명했을 뿐이다. 그 용어를 고안해낸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는 ‘캐나다처럼 잘사는 나라에서 참혹하게 살아가는 빈자들이 여전한 이유’를 알고자 했다. 기실 사람들은 세상이 ‘정의’롭다고 믿거나 믿고자 한다. 상식적 정의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의 원칙을 따른다. ‘뿌림’과 ‘거둠’이 등가로 교환될 때 정의가 실현된다. 그러한 정의관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믿기에 당장의 욕망을 유예하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고, 타인을 해치려는 범죄적 충동도 제어한다. 말하자면 법, 규범, 도덕의 바탕에는 정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며, 그것으로 인간은 함께 살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처참한 상황을 봤을 때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째, 공감하고 연대하기. 자신도 그러한 처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참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한다. 정의로운 행동이다. 둘째, ‘너희 책임이야’라고 하면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무시하기. 이것도 ‘정의’롭다. 나에게도 그런 참사가 닥칠 수 있다는 게 너무 무섭고 불편하다.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는 거 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잖아. 여기서 우리의 ‘충직한’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나와 질적으로 다른 자들이야. 그들은 나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쁜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둔 것일 뿐이야.

피해자를 나쁜 사람 또는 그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면 여러 가지로 좋다. 난 착한 사람이니까 거리낌없이 배와 지하철을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고, 백화점에 갈 수 있다. 게다가 공감하고 연대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이유도 사라진다. 무엇보다 부정의를 자행하는 무섭도록 강력한 ‘그들’과 대거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피해자와 거리를 두면 정의롭게 부정의를 용납할 수 있다.

나도 가짜뉴스가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을 만든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내장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그러한 가짜뉴스에 호응하는 것이라면? 아득하고 두렵지만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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