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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8 16:37 수정 : 2019.05.08 19:04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몇년간 ‘마음’을 주제로 북한 문제를 연구해온 한 대학에서 학술발표 제의를 받았다. 분단체제가 야기한 대립과 갈등이 한반도 안팎에 거주하는 코리안들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강조하면서, 이 대학의 연구자들은 ‘마음통합’을 분단 극복의 과제로 제안하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해왔다. 주최 쪽에서는 내가 빈곤, 노동, 청년을 주제로 중국에서 진행해온 연구를 발표해주길 바랐다. 사회주의 중국이 밟아온 궤적이 향후의 북한을 전망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청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특수성보다는 한·중 엘리트 청년들 간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사회혁신’(중국에서는 ‘사회창신’)은 이들의 마음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용어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최근 들어 기업과 정부기관, 대학과 비정부기구(NGO)에서 자신의 일을 사회혁신과 연결 짓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들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각종 규제, 국회의 이전투구, ‘운동세력’의 편 가르기에 고별을 선언하면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경계와 위계를 허물고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소모적인 적대와 비판을 거두고 비전과 아이디어로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자고 호소한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정신부터 중국 공산당의 병참술까지, 좌우와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혁신의 모범으로 재탄생한 사례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사회혁신이란 주술을 거치고 나니 ‘청년실업의 위기’가 ‘청년창업의 호기’로 탈바꿈했다. 사회가 만성화된 고용 불안정에 시달리는 청년에게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라, 청년이 활력을 잃어가는 사회를 돌보고 새롭게 변화시킬 책무를 자임하게 되었다. “소셜벤처 밸리” 서울 성수동과 “중국의 실리콘밸리” 선전(심천)에서 내가 만난 젊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이 기대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간단히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 사이의 교감이 한국과 중국 간 규모나 체제의 차이를 잊게 할 만큼 뚜렷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디지털 세계의 어법에 능통하고 조기 영어교육을 받은 엘리트 청년들은 상대의 모국어를 몰라도 자유롭게 소통했다. 위챗과 페이스북을 통해 온라인 친구를 맺고, 세계 도처에서 열리는 각종 스타트업 행사와 사회혁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오프라인의 교류도 넓혀왔다. 자기 자신을 당당히 브랜드화할 수 있는 개성, 상대에 대한 적당한 예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코즈모폴리턴 감수성을 갖춘 젊은이들은 자국의 권위적인 시스템과 적당히 밀당하면서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가로 성장하길 꿈꿨다. 성수동부터 선전 난산(남산)구까지, 친환경 텀블러부터 영문 닉네임까지, 이심전심으로 탄생한 엘리트 청년들의 코워킹 스페이스(공유 오피스)는 기묘하게 겹쳐졌다.

나는 이 세계에서 요구되는 상징자본을 갖지 못한 지방대 휴학생의 ‘침입’이 야기한 긴장을 한 소셜벤처 행사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사투리 억양이 짙게 밴 어조로 집요하게 돈에 관해 질문을 퍼붓자 불편한 기류가 감돌았고, 사회자는 행사 후 따로 얘기를 나누자며 그의 말을 끊었다. 중국에서는 이 아슬아슬한 접촉지대조차 보지 못했다. 지난 몇년간 내가 만나온 폭스콘 청년 노동자들이 공장지대를 벗어나 자기를 “토미” “제리”라 소개하면서 데모데이(Demo Day)나 미트업(Meetup)에서 제 또래 스타트업 부족민들과 교류하는 장면이 쉽게 상상되질 않는다.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받은 표창이나 트로피를 에스엔에스(SNS) 인증샷으로 올리는 이들의 취향은 ‘힙’하지 않다.

도래할 시간에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이 남한과 북한의 갈라진 마음일까, 아니면 제 사회 안에 담을 두른 마음들일까? ‘자유민주주의’ 한국과 ‘포스트사회주의’ 중국 엘리트 청년들 간의 유대는 체제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계급적 취향 지대를 관통하는 마음의 구속력을 엿보게 한다. 상대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편안함에 대한 감각을 요구한다. 이질적인 상대와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잠깐 소환하면 그만이다. 문득 서울, 상하이, 평양의 젊은 엘리트들이 스마트 시티와 인공지능을 두고 즐겁게 토의하는 풍광을 그려본다. 내 초라한 상상은 단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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