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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19 18:08 수정 : 2019.05.20 09:36

류영재
춘천지방법원 판사

나는 근현대사를 재판으로 배웠다. 첫 사건은 동일방직 사건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기록을 통해 국가의 시민에 대한 적대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시 중앙정보부 등 국가권력은 어용 노조를 앞세워 여공들이 설립한 노동조합을 강제해산 시키고 그들을 부당해고 한 것으로도 모자라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그들의 재취업을 장기간 막았다. 국가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기는커녕 시민의 생존을 적극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매우 치졸하고 악랄하게.

동일방직 국가배상 재판은 내가 독재정권의 단면을 처음 확인한 순간이었다. 유신헌법조차도 국민의 기본권을 앞세우고 있었는데, 그 헌법 아래에서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버젓이 침해하였다. 판사인 나는 당시 독재 정부의 위헌성을 제3자로서 맘 편히 비난하였다. 그 후 형사재판을 맡게 되자 이번엔 재심 사건들이 줄을 지어 배당되었다. 긴급조치에서부터 국가보안법까지 다양한 죄목으로 유죄를 받은 피고인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하나같이 영장 없이 장기간 구금되어 수사받았고, 고문받아 한 자백과 증언을 통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피고인들은 대학에서 제적당하거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고통받았으며 일가족이 간첩으로 의심받아 사형당하거나 장기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독재에서 사법부의 잔향을 느낀 것이. 기록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피고인들은 고문 때문에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데 재판 기록에 고문을 받았는지 심리한 흔적이 없었다. 당시 법에 의하더라도 고문에 의한 진술은 증거능력이 부정되는데 직권으로 했어야 할 증거능력 심사가 빠져 있는 것이다. 피고인들에게 물었더니 다수 피고인들은 당시 재판에서 고문 주장을 했다고 답했다. 당시 공안 사건 수사에 고문이 빈번했단 점은 상식이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위화감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검토하면서 한층 커졌다. 내가 본 대법원 판결은 3~4장의 짧은 판결이었는데, 그 판결 이유 중 4분의 3은 변호인들의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변호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법리적 주장을 다 하였다. 피고인의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아니한다, 고문으로 인한 자백과 증언은 증거능력이 없다, 긴급조치는 위헌이다, 피고인의 행위는 시민 저항권에 해당된다 등등. 대법원은 변호인의 그 긴 주장을 이유 없다며 단 몇 줄로 기각했다. 위화감이 참담함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역사적 가정이 꼬리를 물었다. 만일 당시 법원이 고문이 있었는지를 심사하여 고문에 의한 진술의 증거능력을 부정하고 무죄 선고를 했더라면, 국가의 위헌·위법한 기본권 침해 행위에 대해 위법성을 인정했더라면,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선언을 했더라면, 정권의 독재가 그만큼 기승을 부릴 수 있었을까.

시민을 탄압하고 고문을 행한 주체가 주로 정부였기에 사람들은 물론 판사들도 독재에 대한 사법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거리를 두곤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역사적 가정을 이어가다 보면 사법은 당시 정권의 독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단 점을 깨닫게 된다. 사법은 정권에 협력하기 위해 재판하는 기관이 아니다. 정권이 헌법을 위반하면 그 위헌·위법성을 선언하여 막아야 한다. 사법의 헌법적 책무이다. 공권력 행사가 헌법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법치주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문수사에 무죄를, 긴급조치에 위헌을, 독재행위에 국가 책임을 선언했어야 한다. 그런데 판사들은 거꾸로 독재를 규범적으로 승인하여 주었다. 독재에 법이라는 이름의 고속도로를 깔아주었다. 이로써 정권은 시민의 기본권을 법으로써 침해할 수 있었다. 법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되 법치주의는 무너졌다.

독재정권의 가장 가혹한 탄압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광주시민 대학살이다. 국가가 시민 대학살이란 어마어마한 탄압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었는가 생각하면, 법이 독재의 뒷배였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독재정권이 물러난 1997년에야 사법은 5·18 광주시민 대학살을 내란·내란목적살인으로 인정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대신 생존을 위협받았던 사람들에게 국가와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재심 재판 당시 한 명의 판사로서 법대에서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가와 법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의 좌절이 사무치게 느껴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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