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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6 17:48 수정 : 2019.06.16 22:07

6월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영화 1987 갈무리

우리는 모두 1987년 6월에 빚을 지고 있다. 군부는 반헌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탄압했다. 어제까지 가르치던 교수가, 같이 배우던 학생이, 같이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처벌받는 일들이 일어났다. 지독한 언론통제 속에서도 시민들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다. 독재 탄압의 잔인함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거쳐 이한열 열사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입을 다물고 있던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터졌던 것일까. 1987년 6월10일부터 같은 달 29일까지 시민들은 거리를 메우고 몸으로 마음으로 목소리를 보탰다. 시민들은 투쟁하여 독재정권에 승리했다. 오롯이 시민들이 희생해가며 쟁취한 결과다. 사법은 그 당시 무엇을 했는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을 때 희생자였던 권인숙은 가해자인 문귀동을 고소했다.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리며 성고문 사건을 은폐하려 하자 권인숙 및 그 변호인단은 재수사를 위해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 판사는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변호인단은 재정신청에 대해 재항고했으나 대법원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군부독재정권이 물러난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사법은 독재정권 아래서는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시민들의 민주화 노력에 힘을 보태지도 않았다. 대신 독재를 헌법과 법의 이름으로 승인해주기 바빴다.

1987년 개헌이 되면서 시민들은 사법 쪽에 어떤 책임을 물렸을까. 놀랍게도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독재가 계속된 최종적인 책임은 제구실을 못 하고 독재를 법의 이름으로 승인한 사법에 있는데, 사법에 대한 어떠한 제도적 통제장치도 마련하지 않았다. 판사 인사권 등 사법행정권을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시켜 대법원장에게 전적으로 귀속시키는 조처만을 취했을 뿐이다. 시민들은 사법을 너무 믿었다. 판사들이 독재정권에 굴복한 이유는 단순히 독재가 너무 악랄해서였다고, 판사들을 정권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시켜 주기만 하면 알아서 스스로 양심껏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판사들이 스스로 정권에 다가가 권력을 나눠 가지려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른 2017년, 소위 ‘사법농단’이 밝혀졌다. 법원의 자체 조사 및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난 사법농단은 간단히 요약하여, ‘대법원장 및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안으로는 판사들을 통제하고 밖으로는 정권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개별 재판을 정권에 대한 국정 협력 수단 내지 사법부 조직 강화를 위한 거래 수단으로 취급’한 사안이다. 앞서 보다시피 우리 사회는 제도적으로 사법을 통제할 수단을 마련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위 사법농단이 형사상 범죄로 처벌될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러나 형사처벌 여부를 떠나 사법농단은 반헌법적이다.

예컨대 강제징용 재판의 경우, 공개된 재판 절차 너머에서 일방 재판 당사자(강제징용 피해자) 모르게 정권과 사법이 재판 절차 및 진행 방향에 관해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 원세훈 재판에 대해 사법행정 담당 판사가 ‘무죄를 내기 위한’ 법리를 검토한 뒤 담당 재판연구관실에 넘기고 청와대에는 2심 재판 결과(유죄)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며 연대감을 표했다. 판사들이 재판을 스스로 정권 협력 수단, 사법부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켜 청와대에 그 인식을 전했다. 대법원 재판 사안에 대해 정부가 제출할 준비서면을 사법행정 담당 판사들이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리를 검토해준 바도 있다고 한다. 판사들은 그 대가로 정권으로부터 원하는 제도 입법화를 받아낼 궁리도 적극적으로 했다. 재판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사법과 정권은 긴밀했다. 재판독립원칙, 법치주의 및 삼권분립원칙, 공개재판원칙이 무너졌다.

1987년 이후 사법은 스스로 군부독재 시절 내린 판결의 위법 무효를 선언하고 있다. 사죄도 하고 반성도 한다. 그러는 동시에 다시 한번 정권에 다가갔다. 이번엔 총칼 위협도 없었는데,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1987년 6월 사법을 너무 믿은 시민들에게 사법은 죄책감 없이 배신을 안겼다. 성난 시민들이 사법을 욕하자 도리어 사법독립이 훼손된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사법은 어쩌다 이렇게 염치를 잃어버리게 됐을까. 2019년 6월 법원 한복판에서 질문을 던진다.

류영재
춘천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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