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7 17:13
수정 : 2019.06.18 13:33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십수가지 병명을 가진 아버지는 거주하는 강원도에서 한달에 한번 내지 두달에 한번 비뇨기과·소화기내과 등에 내원하기 위해 서울로 간다. 아버지의 병원 방문은 1박2일에 걸쳐 이뤄진다. 새벽 일찍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서울에 도착하면 다시 택시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간다. 예약 일정을 확인하는 창구에 들르고 혈액을 뽑고, 이곳저곳에서 진료받을 준비를 모두 거친 뒤에야 의사를 만난다. 의사와 만나는 시간은 1~2분 남짓. 아버지는 그사이 자신에게 일어난 몸의 변화와 궁금한 점을 빼곡히 적어 빠짐없이 묻고 싶다. 하지만 친절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컨베이어벨트처럼 돌아가는 병원에서 한두박자씩 느린 노인 환자는 성가신 존재다. 병원 일정을 마치고 지쳐버린 아버지는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룻밤 자식 집에서 주무시고 이튿날 버스에 오른다. 현대 의학은 인간 수명 연장 기술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하지만 병든 인간이 통과하는 외로움과 절망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쓸모가 소멸되어가는 비정한 사회화 과정이다.
나이 선택제를 상상해봤다. 자신이 선택한 나이에서 멈추고 자신이 선택한 나이에 생을 마치는 것. 최소한 늙어서 당하는 차별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몇살쯤에 나이를 멈출까? 스스로도 예쁘다고 느낀 스물두살 아침에서 멈출까? 일흔쯤 되어 멈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진 않다.
노인은 몇살부터인가? 기준을 찾아보니 노인복지법, 노인장기요양보험법 등 관련법 연령이 동일하지 않다. 다만 65살 정도부터 노인으로 합의하고 있다. 대통령도 노인이고 주요 정치인과 경제인도 노인이라는 말인데, 그들은 노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모든 노인이 사회적 소멸 대상은 아니다. ‘유력’ 노인들은 노인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지 않는다. 다만 노인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위기의 실체로 거론된다.
최근 <한겨레>의 기획보도 ‘대한민국 요양보고서’를 유심히 읽었다. 기자는 늙어버린 육신들의 비참함을 기록했다. 화장실에서 똥 싸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과 그걸 도와주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스템, 대안으로 제시된 가정집처럼 밥내가 나는 공공 요양시설과 공공 방문재가요양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읽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숙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아툴 가완디가 소개한 해리 트루먼의 사례를 보자. 활화산 아래 사는 그는 화산 폭발 조짐이 보여 이주를 요구하는 관계 당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 나이 여든이오. 여든 말이오. 내 마음먹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는 나이라고요.” 그는 1980년 5월18일 오전 8시40분 흘러내린 용암과 함께 묻혔다. ‘해리 트루먼은 자기 집에서 끝까지 남아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됐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에 큰 의미를 남긴 것이다.’ 노인의 존엄한 삶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시작돼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노인이나 장애인, 정신질환자, 노숙인 등이 시설 밖으로 나와 평소 살던 동네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 체계인 커뮤니티 케어’가 이런 고민의 해결책이 될 것인가. 건강이 나빠지기만 하던 부모님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집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노인 이용 골프장 덕이다. 운동을 시작하고 두분 모두 건강하고 밝아졌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두달 뒤 아버지의 운전면허 갱신기간이 닥쳤다. 최근 여론은 노인 운전면허를 제한하자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고령 운전자를 대상으로 면허를 자진 반납하도록 유도하는 제도가 일부 시행됐다. 운전면허가 없으면 두분의 소소하나 확실한 행복은 빼앗기게 된다. 실제로 고령 운전자 사고가 급증하는 통계가 있으니 대안은 필요하지만 노인들의 일상을 희생하지 않는 대안이 함께 나와야 한다. 커뮤니티 케어는 ‘커뮤니티’(공동체)와 ‘케어’(돌봄)가 사라진 사회에서 현실적인 딜레마의 빈곳을 채워주어야 대안이 될 수 있다. 빼앗고 쫓아내는 방식의 프레임을 바꾸지 못한다면, 살던 방식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요양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노인만 양산된다. 노인을 버리는 체제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책은 소용이 없다. 존엄하게 소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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