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25 17:47
수정 : 2019.06.26 12:35
이원재
LAB2050 대표
‘현금복지는 독인가요, 약인가요?’라는 토론회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소득은 밥입니다’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과거에는 고용만으로 소득보장까지 가능했다. 직장에 소속되어 30~40년을 일할 수 있던 시기였다. 그 기간 동안은 직장에서 소득을 보장받은 뒤, 나와서는 퇴직금과 연금으로 생활하는 삶이 표준이었다. 기업의 도산이나 부당한 해고 등으로 그게 멈추는 상황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이런 일은 대형 재난 비슷하게 여겨졌다. 그러니 국가의 일자리정책은 곧 소득정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용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 한 직장에서 평생 소득안정을 찾는 회사원의 삶은 소수의 특권이 되어버렸다.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고용정책을 아무리 열심히 펼쳐도 모두에게 소득을 보장하기는 어렵게 됐다.
개인들은 불안하다. 지나친 공공기관 취업 선호부터 무리한 부동산 투자까지 여러 문제가 벌어진다. 불안하니 일단 최대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최대한 안정적으로 가치가 유지될 듯한 자산을 확보한다. 위험한 도전이나 용기있는 모험 따위는 자리잡을 틈이 없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다 멈췄다 다시 일하기도 하고, 파트타임과 풀타임을 오가며 일하기도 한다. 직장에 속하지 않고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기도 하고, 혼자 일하기도 하는 삶을 산다.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일을 자원봉사처럼 하면서 살기도 한다.
이 모든 삶이 빠짐없이 존중받으려면, 일자리 정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이 임금소득에서도, 노후연금소득에서도, 실업급여소득에서도 차별받는 지금 상황이 부조리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순전히 고용계약을 통해서만 생계를 보장받는 사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특수한 형태다. 산업혁명의 성과가 이미 확산된 19세기까지도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으로 교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노예처럼 붙잡혀 강요당했거나, 권력에 봉건적으로 의존해 살아가야 했거나, 자신이 권리를 가진 땅에서 직접 생계작물을 생산하는 등의 경우에 일을 했다. 그때 국가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동원해 기업에 보낼지를 고민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여러 나라가 노동자의 무단 퇴사를 처벌하는 법률을 운영할 정도였다.
한 세기가 흐르고 나서, 다시 기업은 고용하기 싫어하고 사람들은 기업에 매인 삶을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시대가 되돌아오고 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산업혁명의 결과다. 이 환경에 맞는 소득분배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기본소득제 등 국가가 개인에게 직접 분배하는 제도가 계속 논의되는 이유는 그게 유력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새롭고 낯선 길이지만 마땅한 다른 길도 없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최근 낸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에서 “유럽 복지국가도 미국 패권기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복지체제”라고 언급한다. 맞는 접근이다. 완벽한 다른 나라를 찾아 모방하려 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고유의 체제를 스스로 고안해야 한다. 우리처럼 자영업 비중이 높고 수출과 내수가 극심한 불균형을 이루며 상위 10%에 소득이 몰려 있는 경제는 찾기 어렵다. 이런 특성을 고려한 분배구조를 찾아가야 한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취임하면서 “일자리와 소득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소득은 일자리와는 별도로 챙겨야 한다. 시장·군수·구청장들은 ‘복지대타협특위’를 만들었다. 지방정부들은 그동안의 다양한 시도를 양분 삼아 새로운 복지체제의 싹을 틔워야 한다.
우리 소득보장정책은 이제 걸음마를 뗀 상태다. 우리 복지는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에 견줘 규모도 작지만 소득보장은 미약하며 주로 현물 지급 중심이다. 아직 정책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므로 우리가 주도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보장정책을 만들어나가기는 오히려 좋은 환경이다.
지금이야말로 국민연금부터 기본소득제까지 다양한 소득보장정책들에 대해 방향을 잡을 적절한 시점이다. 중앙정부와 국회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공론의 장을 열고, 실험과 연구를 진행하며 미래를 주도적으로 설계해나가야 한다. 적절한 소득정책 없이는 혁신성장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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