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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30 18:31 수정 : 2019.07.01 09:34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얼마 전에 끝난 ‘20세 이하 월드컵’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메시와 비견되는 선수를 선사했다. 이강인은 분명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손흥민처럼 빠른 발이나 강한 슛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게임을 읽고 짜고, 판도를 바꾸는 그의 능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손흥민의 ‘킬 슛’이 멋지다면, 이강인의 ‘킬 패스’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강인의 진짜 매력은 빼어난 축구 실력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그의 태도와 품성에 있다. 그는 모두가 16강을 목표로 삼을 때 우승이 목표라고 담대하게 말했고, 다들 ‘잘 뛴 선수’에게 주목할 때 ‘안 뛴 형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강인은 당당하고 사려 깊었다.

모든 인터뷰에서 ‘안 뛴 형들’을 언급하는 이강인의 태도에서 유럽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이 읽힌다. 자신에게 온갖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선 경기에 뛰지 못한, 주목받지 못한, 그리하여 쓰라림을 맛보았을 ‘형들’에 대한 염려가 먼저였다. 나는 이런 ‘사회적 감수성’을 길러준 것이 스페인 교육, 유럽 교육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유소년기에 스페인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레 이런 품성을 익혔기에 그는 항상 공동체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염려하는 성숙함을 지니게 되었으리라.

이강인의 사회적 감수성과 공감 능력은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품성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끝없는 경쟁’과 ‘극단적 개인주의’라고 했다. 이것이 한국인의 일상을 ‘사막화’하고, 생활리듬을 ‘초가속화’한다고도 했다. 아픈 만큼이나 타당한 비판이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개인주의가 극단화된 우리 사회는 ‘안 뛴 자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공동체다. 이 사회는 운동장에 나서지 못한 자,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자, 정규적인 일자리가 없는 자, 주류문화에서 배제된 자의 고통에 둔감하다. 주류들의 그라운드에서 뛸 기회를 잡지 못한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소수자, 이민자, 난민 등 사회적 약자들은 매일 좌절감을 느끼며 산다. ‘안 뛴 형들’도 공동체의 소중한 일부라는 이강인의 인식이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최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자사고 논란을 보라. 문제의 핵심은 경쟁교육이냐 연대교육이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며, 논란의 본질은 평가 지표의 공정성이라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육이 지향해야 할 장기적 목표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이다. 자사고 문제는 교육도 시장의 경쟁에 내맡겨야 한다는 이명박식 천민자본주의가 한국 교육에 가한 테러다. ‘내 돈 가지고 내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막무가내로 덤비는 학부모들의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교육을, 사회를, 결국은 이 땅의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

오늘의 독일 교육은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고 규정한 아도르노의 교육철학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경쟁을 지양하고자 하는 독일 교육의 이념은 ‘등수 없는 학교’로 실현되었고, 무엇보다도 ‘홈스쿨링’ 불법화로 구현되었다. 홈스쿨링을 금한 2010년 브레멘 최고행정재판소 판결문을 보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배울 수 있는 사회성이 떨어지고, 의지를 관철시키는 능력이 약화되며, 책임감을 배울 수 없다. 고른 인격 형성을 위해서는 타인과 어우러지지 않는 교육은 의미가 없으며, 당연히 학교와 연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사회적 감수성이 결여된 교육, 인성보다 수월성을 앞세우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아도르노의 관점에서 보면 경쟁을 핵심 원리로 삼는 한국 교육은 야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반교육’이다. 자사고 문제의 중심에도 바로 경쟁 이데올로기가 있기에 “자사고 폐지가 시대정신”이라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말은 옳다. 우리는 ‘안 뛴 형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이강인의 어눌한 의젓함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 좋은 공동체는 모두 함께 가는 공동체이다. 내 자식만 출발선에서 한발짝 앞세우려는 욕망은 공동체에 해를 입힌다.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적 욕심 때문에 학교를 무한경쟁의 정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안 뛴 형들’, ‘소외된 동생들’, ‘약한 이웃들’이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는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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