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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30 18:21 수정 : 2019.07.30 20:22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초·중·고등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청원이 올라왔다. 2018년 1월6일의 일이다. 처음에는 이 청원이 과연 20만명에 도달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일선의 뜻있는 교사들과 10대 성교육자 등이 힘을 모으고 지역 육아카페에서 이 청원에 동참하자고 독려하는 글을 너도나도 올리면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육아카페의 회원들은 요즘 초등학교 남학생들이 쓰는 욕설이 심각한 수준이고 특히 엄마를 욕하는 문화가 퍼져 있어 놀랐다며 교육을 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청원 막바지에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20만명을 초과 달성한 것은 이런 마음이 더해진 결과였다. 청원이 종료되자마자 페미니즘 의무교육에 반대한다는 청원이 올라왔지만 목표치에는 한참 미달한 채 종료되었다.

불과 1년 반 전의 일이다. 지금 페미니즘 의무교육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다. 2019년부터 각 군 사관학교에서는 ‘성인지 리더십의 이해와 실천’이 필수교양과목으로 지정되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는 2018년 2학기부터 ‘예술가의 젠더연습’을 모든 학생이 필수로 수강하도록 하고 있다. 꽤 오랫동안 대학 강의를 해왔지만 소규모의 학생들과 15주 동안 강의와 토론이 병행된 수업을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방법과 태도가 필요하다. 강의실은 때로는 침묵과 긴장이 흐를 때도 있고 활발한 토론 끝에 나도 미처 몰랐던 흥미롭고 생생한 의견이 교환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촉발되기도 했지만 ‘예술가의 젠더연습’ 수강생들이 직접 한 말에 의하면 그것조차 중요한 배움의 과정이었다고 한다.

물론 무작정 열린 토론을 하지는 않는다. 이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심 두개의 허들을 넘으면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린다. 첫번째는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말들은 토론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배우는 것이고, 두번째는 차이로부터 배움이 생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첫번째 허들을 넘으면 두번째로 이어지는 건 비교적 쉽다. 차별과 혐오가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고 배제된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가장 어렵다. 누구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지만 아무도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다지 높은 지위가 아니므로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라면 그런 식으로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피해자의 입장에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중립을 가장한 침묵을 선택한다. 질문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건 아닌지, 왜 어떤 사람은 늘 해명을 요구받는지, 권력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려면 약자의 입장에서 과연 어떻게 다르게 이 사회를 겪어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권력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며 누구나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도 전전긍긍하는 을의 위치에 있을 때도 있다. 그런 ‘맥락’을 살피는 능력을 키워내는 것이 바로 성평등 교육의 중요한 목표다.

2010년 엘레오노르 푸리아 감독이 만든 11분짜리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는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한 교육 자료다. 2014년 감독이 직접 유튜브에 영상을 무료로 공개했고 조회수가 1325만에 달한다(한글자막판은 25만회). 이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적 괴롭힘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예민한 건 아니냐고 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중학생 성윤리 시간에 다름 아닌 이 <억압받는 다수>를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가 수업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광주교육청은 해당 수업에 대한 민원을 이유로 들며 성비위 사건 처리에 따른 ‘매뉴얼’대로 행동했다고 주장한다. 토론보다 민원을 중시하고 교육보다 매뉴얼을 앞세워서야 어떻게 교실에서 성평등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우리 사회에 토론과 대화는 가능한가? 해당 교육청 관계자들이 얻고자 하는 건 제대로 된 성평등 교육인가, 아니면 민원인에 대한 성실한 응대인가? 그럼 대체 교육은 누가 어디서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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