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7 17:10
수정 : 2019.10.28 02:36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벼락이 만든 ‘역대급’ 사고는 1769년 북부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발생했다. 브레시아의 한 요새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곳에 90톤에 달하는 화약을 보관 중이었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약 3천명이 죽었다고 했다. 처참한 사고가 알려지면서 유럽의 각 나라는 벼락에 대비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가령 영국에서는 화약 공장과 보관에 관련한 법령을 준비했는데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이 조언했다. ‘피뢰침을 설치하세요.’ 그는 이미 20년 전에 피뢰침을 발명했다.
벼락 방지 효과가 탁월했지만 피뢰침이 유럽의 가옥과 창고와 건물과 교회에 설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록을 보면 20세기 초까지도 벼락을 피하게 해주는 천둥약초(Donnerkraut)를 키우는 곳이 있었다. 피뢰침 도입에 가장 큰 우려를 표명한 건 기독교 성직자였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번개와 벼락은 신의 안배다. 벼락은 창조주의 손에 있는 화살일 뿐이다. 벼락은 신이 원하는 곳에 정확히 떨어진다.” 말하자면 신의 ‘스마트 폭탄’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에 피뢰침을 설치하면 안 된다.
계몽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에 격렬히 반발했다. “홍수에 대비하고자 댐을 쌓고,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소화기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벼락에 대비하는 건 사람이 할 일이다. 그런 ‘합리적인’ 사람들이 언제나 합리적이진 않았다. 피뢰침의 효능에 취한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175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엄청난 지진과 화재와 쓰나미가 일어난 건 그곳에 단 하나의 피뢰침도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탁월한 발명품인 피뢰침마저도 ‘벼락처럼’ 도입되지 못했다. 새로움의 도입은 설왕설래를 거치기 마련이다. 움베르토 에코에 따르면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품 또는 문화상품이 사회의 두가지 상반된 반응을 거의 언제나 촉발한다. “종말론자”는 새로움을 걱정한다. 문명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응자”는 새로움에 열광한다. 문명을 발전시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피뢰침을 걱정했다. 신을 무장해제시켜 신이 만든 질서, 곧 착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고 악인에게 벼락을 내려 유지하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들은 피뢰침에 열광했다. 지나친 열광자는 피뢰침이 모든 자연재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의 새로움만이 걱정과 열광을 유발하지 않는다. 사람의 새로움, 즉 젊은이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두가지 새로움이 합쳐지면 사회의 반응은 더 뜨거워진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술을 장착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젊은이의 등장! 비관하는 종말론자는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청년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 우려하고, 열광하는 순응자는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는 젊은이가 정체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 찬양한다. 물론 ‘뼛속까지’ 종말론자이거나 순응자인 사람도 있겠지만, 한번 취한 입장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다. 입장의 선택과 변화, 바로 그곳에서 ‘비즈니스’의 여지가 돋아난다.
젊은 세대를 알고자 하는 사회의 욕구는 사실 보편적이다. 미래를 걱정하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걱정과 기대는 호기심을 자아낸다. 젊은이의 특성이나 속내를 알고 싶지만, 일반인이 그들을 정의하고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때 언론이나 전문가가 도움을 준다. ‘우리 젊은이가 글쎄 이렇답니다.’ 언론이나 전문가에게 세대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세가지 선택안이 있다. 종말론, 순응, 또는 양 선택안의 경계에서 암중모색하기. 그런데 선택의 기준은 젊은이의 ‘실체’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서구와 한국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보면 그러한 추정이 힘을 얻는다.
서구나 한국에서 청년 세대를 순응의 입장에서 묘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포노 사피엔스”, 곧 스마트폰을 쓰는 청년에게 기대 어린 전망), 서구의 대세는 종말론 입장이다. 학교를 떠나 사회에 대거 진입한 시기부터(대략 2015년께) ‘밀레니얼세대 때리기’가 유행하는 중이다. 특성을 보면 서구의 청년과 한국의 “90년대생”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청년때리기’가 약하고 종말론과 순응의 경계에서 암중모색하는 선택이 많다. 아마도 청년의 비참한 사정을 크게 걱정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비난이나 찬양이 곤란한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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