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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8 18:13 수정 : 2019.11.19 02:40

이강국 ㅣ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바야흐로 공정이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된 듯하다. 조국 전 장관의 사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정’을 27번이나 언급했고, 정부는 대입제도에서 정시를 확대하는 방향을 발표했다.

공정이란 일반적으로 반칙이 없는 과정, 즉 모두가 차별 없이 투명하게 경쟁하는 결과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부모 덕에 스펙을 쌓아 명문대 입시에 성공하는 것보다 똑같이 치른 시험의 성적으로 결과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공정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능력주의와도 관련이 크다.

물론 이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공정 개념으로, 평등한 결과를 포함하는 더욱 넓은 공정 개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실제로 뉴욕대의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보수파는 공정을 비례성의 원칙으로 생각하는 반면 진보파는 공정을 평등의 원칙으로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현재 이야기되는 공정은 주로 비례성과 관련된 협소한 개념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은 이런 관점에서 정시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반면 저소득층이나 특정 지역을 배려하는 전형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부 대학생들은 친구들을 ‘지균충’ ‘기균충’이라 부르고, 공공 부문에서 시험을 보고 들어온 정규직 청년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지 않은가.

하지만 비싼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강남의 부유층 자녀들이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정시에서 더 높으니 때때로 형식적인 공정은 결과의 평등과 갈등을 빚게 된다. 실제로 소득 상위 계층일수록 대학 입시에서 학종(학생부종합전형)보다 정시를 더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나아가 이렇게 좁은 공정 개념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능력이 있으니 성공했다는 능력주의를 떠받치고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많은 중상류층이 세습으로 부자가 된 이들을 비판하면서 저소득층의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내는 일에 반대하는 것도 혹시 우리 안에 내재한 능력주의 때문은 아닐까. 흔히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메리토크라시’(출신이나 집안 등이 아닌 능력이나 실적, 즉 메리트에 따라 지위나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체제)라는 단어 자체가 엘리트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를 경고하는 의미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개인의 능력을 부모나 집안과 같은 환경요인과 분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러 연구는 어린이 때부터 부모의 소득과 같은 요인이 지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한다. 심지어 아기가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환경이 아기가 태어난 후의 건강과 자란 후의 성공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집안 환경 등의 이유로 저학년 때에 비해 고학년이 될수록 부잣집과 가난한 집 아이들의 성적 차이가 벌어진다. 실험 연구는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인지능력에 차이가 없는데도, 가난한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생각하도록 하면 부자들보다 인지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고한다.

그렇다면 심각한 불평등을 그대로 두고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것인가. 결국 형식적인 과정의 공정을 추구한다 해도 부자 부모를 둔 아이들이 입시에도 졸업 후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부모 사이의 결과의 불평등이 자식들에게 기회의 불평등으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세대 간 소득탄력성이 낮아서 기회의 불평등이 낮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악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그런데도 청년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지금 공정에 목마른 것은 노력이나 능력과 결과가 괴리되는 불공정한 반칙이 흔히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노동시장의 소득에서 결과의 불평등이 크다면 불공정한 과정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지기 쉽다. 불평등이 심각한 현실에서 과정마저 불공정한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따라서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하는 과정의 공정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것은 이와 함께 결과의 격차를 줄이고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수저가 다른 아이들 사이에는 제대로 된 경쟁이 힘들고, 평등 없는 공정은 한계가 크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역시 불평등에 맞서는 싸움이다. 아이들의 출발점을 고르게 만들고 입시에서 기회균형선발을 확대하며,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소득재분배를 강화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공정과 평등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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