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18 18:11
수정 : 2019.12.19 09:44
조문영 ㅣ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세상이 안전하지 않아요.” 올 한해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자주 들은 단어가 ‘안전’이다. 악플에 시달리던 젊은 여배우가 목숨을 끊었을 때, 누군가 나의 소수자 정체성을 위협했을 때, 수업 중에 소신 있게 던진 주장이 익명의 게시판에서 조롱당했을 때 학생들은 움츠러들었다. 안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경계에 대한 감각도 커졌다. 세태를 읽지 못한 선생은 조모임을 수업의 일부로 당연시하지만, 조원들은 서로가 ‘안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곧추세운다. 서로에게 존칭을 쓰면서 거리를 확보하고, 로스쿨이 대세가 된 흐름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세세한 규칙을 정해 관계를 마름질한다. ‘친구’란 단어가 아득해졌다.
이런 세상에서도 누구는 만인의 ‘친구’가 된다. 펭하! <교육방송>(EBS) 프로그램 <자이언트 펭티브이(TV)>를 통해 알려진 열살 펭수는 남극에서 태어나 스위스를 거쳐 한국에 왔다. 단번에 오디션에 합격해 이비에스 연습생으로 활약할 정도로 실력도 제법이다. 담배 한 갑은 태웠을 법한 목소리로 요들송을 멋지게 부르고, 민속촌에서 한가락 뽑는 판소리도 일품이다. “아하 놀랐다면 미안 이런 펭귄 처음이지 자이언트 펭펭 에- 오- 남극에선 혼자였지 남과 다른 덩치 원래 그래 특별하면 외로운 별이 되지….” 한 외신이 “동방예의지국 한국이 무례한 펭수와 사랑에 빠졌다”고 보도할 만큼 펭수는 겸손을 모른다. 제 사장 이름을 거침없이 내뱉고, 라이벌 뽀로로에 대한 경쟁심을 숨기지 않고, 우주의 슈퍼스타가 되어 모두에게 행복과 웃음을 나눠주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힌다.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펭수의 호기로움만큼이나 시선을 붙잡는 건 펭수를 감싸 안는 친구들의 지극정성이다. 펭티브이 유튜브는 펭수 덕분에 살아간다는 감사의 댓글로 차고 넘친다. 병실의 환자에서 학생, 회사원, 중년의 주부까지 예외가 없다. 펭수의 성공을 바라는 친구들은 정부나 기업, 미디어의 애정 공세를 환영하면서도 펭수가 혹여 마음을 다칠까, 악플이 달릴까 좌불안석이다. 일정이 너무 바빠 피곤하진 않을까, 무리한 인터뷰에 목이라도 상할까, 누군가 헐값에 저작권을 가로채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펭수는 펭수일 뿐”인데 펭수의 ‘정체’를 찾아 신상털기를 하는 것도, 이 ‘정체’의 과거 발언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도 달갑지 않다. 펭수를 의인화해서 ‘남성’으로 못 박는 것도, 펭수를 국민화해서 법적 권리와 의무를 논하는 것도 꺼려진다. 펭수를 한낱 캐릭터 취급 하며 가치를 셈하는 것도 싫지만, 펭수를 두고 근엄하게 분석하는 것도 짜증난다. 가끔 허물을 보이거나 말이 오락가락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은, 그래서 우리는 펭수의 ‘친구’를 자처한다.
펭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 집합의식에서 나는 삶의 단순함에 대한 희구를 엿본다. 만인이 접속을 통해 존재하는 시대에 아득한 꿈이다. 이 접속이 생명을 살리고, 창의와 혁신을 도모하고, 우리를 불의와 폭력의 현장에 가닿게 하고, 새로운 공동체성을 고민케 한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센서는 확실히 너무 많은 사건을 만들고, 너무 빨리 행동을 촉구하거나 제도를 바꿔낸다. 새로운 연결망을 따라 문제도, 평가도, 개입도 빠르게 증식한다.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은 성을 내거나, 오히려 입을 닫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증명할 모범 답안을 외우기에 급급하다.
이 접속 덕택에 펭수를 만났지만, 펭수의 친구들은 과잉 접속으로부터 펭수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온갖 경쟁과 평가를 거치면서 제 인성은 고작 점수로 남았지만, 펭수의 ‘펭성’만큼은 세간의 논란을 잠재우고 귀하게 지켜주고 싶다. 불평등이 상식이 된 시대에 펭수에게 “노동 착취”와 “특혜 논란”에 관해 질문하는 기자들의 “고정관념”을 타박하고, 펭수만은 말은 차고 넘치나 변화는 요원한 세계에서 벗어나 단순한 꿈을 꾸고 단순한 행복을 누리길 바란다.
이 삶의 ‘단순함’이란 대체 뭘까? 일상의 불안이 생존의 위협으로 감각되는 나의 학생들에게도 펭수는 위안일까? 온갖 분석으로부터 펭수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나의 의지는 보수성의 발현일까, 아니면 비판의 쓸모를 되묻는 걸까? 세상을 살아내는 것만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누군가 제 맘대로 세상을 읽어내는 칼럼은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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