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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7 18:59 수정 : 2020.01.08 02:08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2020년대는 이별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세 커플의 이별이 이미 진행 중이다. 미국과 중국, 기업과 노동자, 지식인과 노동계급이 그들이다. 지난 50여년 동안은 만남의 시간이었다.

첫째, 미국과 중국이 만났다. 50년 전 미국의 리처드 닉슨이 중국의 마오쩌둥을 찾아갔을 때 세계가 주목하면서도 의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 나라는 공동의 비전을 만들어냈다. 자유무역질서가 시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 언젠가 민주주의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주류 세계질서는 영원한 황금기를 맞는 듯했다.

둘째, 기업과 노동자가 만났다. 기업가들이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했고, 노동자가 임금을 높이려면 좋은 기업이 필요했다. 노동자와 그 가족 사이에는 가부장적 위계가 생겼고, 돈벌이와 돌봄을 분담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벌이가 있는 사람이 부모와 자녀를 부양하는 분배 체제가 정착됐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일부 분배만 국가가 맡으면 됐다.

셋째, 지식인과 노동계급이 만났다. 이 커플이 만들고 지켜낸 서구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정치는 보수정치와 격렬하게 충돌하며 복지국가라는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금 이 커플 각각은 본격적인 이별 절차를 밟고 있다.

첫째, 미국과 중국이 이별하고 있다. 며칠 뒤면 미-중 무역전쟁의 1라운드가 마무리된다지만, 이 커플이 재결합하는 신호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거의 조건이던 공동의 비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공지능으로 무장하고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페이스북과 구글 사용을 체계적으로 막으며 비판세력을 감시하는 권위주의 국가다. 미국은 유엔 가입국인 이란 군부 실세를 암살하고 보호무역을 표방하면서 자유주의 이상을 버렸다.

둘째, 기업과 노동자가 이별하고 있다. 기업가와 노동자는 만날 필요가 줄어든다. 자동화 기술 덕에 직접 고용을 최소한으로 줄인 생산이 가능해졌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조각조각 일을 나누어 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임금을 통한 분배체계가 흔들린다. 게다가 저출생과 1인 가구의 급증으로, 부양자와 피부양자의 가족 내 협력체계도 깨지고 있다. 일자리와 가족 내 분배체계에는 기댈 수 없게 됐다. 당연히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국가가 필요해진다.

셋째, 지식인과 노동계급이 이별하고 있다. 서구 진보정치는 고학력 지식인과 노동조합 관료들이 지배하는 정당으로 바뀌고 있다. 이들이 기존 보수정당과 정치권력을 과점하면서, 실제로는 안정적 고소득층인 자신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말았다. 갈 곳 없는 불안정 계층은 트럼프주의자로, 브렉시트주의자로, 극우정당과 노란 조끼로 나라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방황하고 있다.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세계 어디든 살 수 있는 ‘애니웨어’(anywhere) 계층이 권력을 독식했다. 뿌리박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섬웨어’(somewhere) 계층은 소외되어 극우정치의 토양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생사를 건 듯 싸우면서도 ‘자유무역과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깃발을 향했었다. 한-미 에프티에이(FTA·자유무역협정)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을 열었고, 한-중 에프티에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의 지지자가 함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기도 했다. 우파도 좌파도 복지국가를 내걸고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중국이 함께하고, 대내적으로는 기업과 노동자, 지식인과 노동자가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시간 동안에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해지는 듯 보여도 사람들의 삶은 그리 흔들리지 않는다. 사회 체제 자체에 구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구심력이 취약해지면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일자리 중심 복지국가는, 완성되기도 전에 위기를 맞게 됐다. 일자리 불안이 커지고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져서다. 자동화의 확산과 심화, 플랫폼 경제의 빠른 확산, 국민연금이나 공공부문 정규직화에 대한 젊은층의 반발 등이 그 징후다. 이대로 가면 취약한 우리 사회는 산산이 찢어질지도 모른다.

앞으로 10년, 우리에게는 구심력이 필요하다. ‘섬웨어’와 ‘애니웨어’가 함께 살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 대안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사회를 다시 묶어낼 리더십을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다시 문제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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