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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8 18:41 수정 : 2020.01.09 02:07

신영전 ㅣ 한양대 의대 교수

사랑은 없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전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거기에 사랑이 없음을 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에게 연신 그려 보이는 후보자의 하트 모양 안에도 사랑은 없다. 쇼펜하우어도 그랬다. 사랑은 단지 성욕과 생존 욕망의 가면일 뿐이라고. 인간 중에 가장 지혜로웠던 소크라테스도 사랑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녀에게 임대주택 아이와 놀지 말고 친구를 밟고서라도 1등이 되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조차 자기애, 소유욕, 노후 불안의 반영이거나 집착일 뿐이다. 식사 후에 설거지를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조시마 장로의 말처럼, 인류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는 있지만 다른 이와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편안히 보내지 못하는 그런 인류애는 사랑이 아니다. 자기 종교를 믿으라고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신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인종·종교·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종교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도 모두 거짓이다.

사랑이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지난 한 해도 10만명이 넘은 이들이 일터에서 다치고, 2천여명이 출근한 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석탄화력발전산업 산재 사상자 334명 중 98%가 하청 노동자였다. 인공지능, 바이오 일류 대국을 외치는 나라에 튼튼한 비계(임시 가설물)와 단단한 나사 하나가 없어 지난 한해 노동자 300명이 떨어져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한해 1만4천명에 이르고, 지난해 길에서 죽은 노숙자도 150명이 넘는다. ‘사랑’을 외치던 사람들이 청와대에 들어가도 소용없다. 지난 1년 새 70여명의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1990년대 말, 북쪽에서 30만명이 굶어 죽었을 때도 쌀이 남아돌던 남쪽 사람들은 남의 일인 양 모른 척했다. 요즘처럼 추운 날, 서대문역 근처의 78살 김아무개 할아버지는 온종일 폐지를 모아도 일당 1만원인데, 비슷한 나이 아무개 재벌 인사는 몇 년째 누워만 있어도 지난 한해 지분가치만 4조원 이상 늘었다.

나쁜 것은 늘 재빨리 국경을 넘는다. 지난 한해 세계 48명의 언론인이 피살됐다. 8년이 넘어가는 시리아 내전에선 사망자가 40만명에 육박한다. 이 중 죽은 아이들만 2만1천명이 넘는다. 세계경제가 얼어붙어도 강대국 군비산업만은 늘 호황이다. 지금 지구에서는 전 인류의 두 배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 시간에도 8억3천만명의 사람이 영양실조로 죽어간다. 오늘 하루도 1만4천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1천명당 5.4명이 정신적, 육체적 착취에 시달렸다. 인신매매 10건 중 7건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로 나타났고, 아동 착취도 전체 인신매매의 25%에 달했다. 인신매매 시장 규모는 약 170조원이다. 사랑이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이런데도 누가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수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남의 땅을 점령한 후 점령군이 제일 먼저 외치는 것이 ‘평화’와 ‘질서’이듯, 이 시대에 사랑을 외치는 자가 범인이다. 그는 뺏으려는 자, 주지 않으려는 자다. 깜깜한 밤 도시 전체에 펼쳐진 붉은 십자가 군상, 신용카드는 안 되고 현금으로만 통행료를 받는 화려한 사찰들은 이 땅이 공동묘지요 조폭의 소굴임을 보여준다. 사랑이란 말이 범람하는 이 시대는 사이비 종교의 시대다. ‘사이비 종교’란 특정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한 자, 아픈 자, 집 없는 자,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이주자와 난민, 성 소수자의 편에 서지 않는 종교, 약자들이 천사임을 모르는 종교가 사이비다. 이 땅에서 신의 추종자들은 미워하느라 더 바쁘고 돈을 세는 데 더 노련하다. 침략자의 맨 앞자리는 늘 그들 차지였다. 이 땅엔 종교만 있을 뿐 사랑은 없다.

바야흐로 새해다! 사랑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 마시라. “지극히 선한 것에는 이름이 없다.” 이제부터가 진짜 삶이다. 배우자, 국회의원, 기업, 종교 지도자에게 사랑 말고 구체적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스스로 행하라. 사랑은 안 해도 되니 희생을 요구하지 말라, 차별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지만, 사랑이 없기에 모든 인간은 죽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했지만, 사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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