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22 19:47
수정 : 2006.06.0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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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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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금연운동을 하는 인연으로 그랬겠지만,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난데없이 초등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금연포스터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못 엄숙하게 예술성, 독창성, 메시지의 전달력 등 심사기준을 정하고 시작했건만 심사는 금방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눈에 보아도 몇몇 작품이 뭔가를 베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군데군데 누군가 덧칠해 준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심사는 점점 미술작품 감상이 아니라 수사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이 작품과 이 작품은 디자인이 똑 같네요.” “이 부분은 누가 덧칠했어요.” “이것은 재작년 수상작품하고 거의 똑같네요.” 심사위원들은 문제가 되는 작품들을 가려내느라고 애를 썼지만 개운치 않게 수상자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 후 학생과 학부모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시상식장에서 사회자가 갑자기 나에게 심사평을 부탁했다. 당황한 나는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다가 너무 칭찬만 한 것 같아서 포스터 중에 학원에서 손을 대준 것 같은 작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랬더니 뒤에서 희희낙락하던 학부모들이 하나같이 얼굴 표정이 납처럼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랬구나, 그제야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배제한 작품들은 물론이지만, 이 수상자들의 대다수도 그러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보니 미술학원에서는 공모가 있으면 기존 수상작을 참고로 해서 도안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아이들에게 그리게 한 뒤 덧칠해서 출품하는 모양이었다. 학부모는 과정이야 어떻든 상을 받는 데 중점을 두고, 엄마의 바람을 무시할 수 없는 학원에서는 덧칠을 해서라도 상을 받도록 노력한다. 그래야 평이 좋아져서 내년에도 학생을 모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이 반장 ㅂ군을 문교부 장관상(지금 교육부 장관상) 후보로 추천하게 되었다. 그 추천서를 우연히 읽어본 나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몇몇 급우들이 불우한 일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심지어 한 친구 아버지가 병환에 걸렸는데 학급회의를 열어서 도와주었다는 영웅담까지 씌어 있었다. 한 어린이신문 주최 백일장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작품도 실은 담임 선생님이 써 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했다. ㅂ군은 결국 수많은 수상경력과 추천사를 바탕으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그런 일을 꾸미는 이유가 교사 점수 때문이라는 것은 어른이 된 뒤에야 알았다.
나는 두렵다. 혹시 금연포스터 대회에서도 어떤 아이가 자기 실력만으로 그려서 냈는데, 내 눈에 그 아이의 그림은 세련되어 보이지 않아서 떨어뜨린 것은 아니었던가. 만약 그 아이가 큰 상을 받았더라면 그림 그리기에 더 자신감도 붙고 흥미도 느낄 수 있었는데, 스스로 소질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림 그리기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또는 백일장 대회에도 어느 순박한 아이가 자기 힘만으로 글을 써서 냈는데, 심사를 하는 어른들 눈에는 너무 단순하게 보여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교사가 덧칠해 주고 손 봐 준 작품들은 미술대회와 백일장대회를 휩쓸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아이들은 반장도 되고 전교 어린이 회장도 되고 교육감상도 받는데,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죄없이 눈 맑은 소년 소녀들은 자기의 가능성과 소질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범하고 무능하고 주눅 든 아이로 자라고 있지나 않은지. 혹시라도 우리가 거기에 알게 모르게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홍관/국립암센터 금연클리닉 책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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