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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8 20:55 수정 : 2006.06.09 16:38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야!한국사회

“대학은 사회비판담론의 산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비판과 저항, 그리고 대안담론을 담는 창조적 공간이다.” 정년퇴임 고별강연에서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한 말이다. 내게 이 말은 대단히 울림이 컸지만, 오늘의 한국대학이 처해 있는 일반적인 상황을 지켜보고, 또 분규대학의 한 교수로서 파행적인 대학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안타까움만이 증폭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저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기원은 교육을 위한 조합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학생 조합(universitas) 중심의 대학은 주로 이탈리아와 남유럽에서, 교수조합(collegia) 중심의 대학은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은 학생조합이 중심이 된 대학이었고, 신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파리대학은 교수조합 중심의 대학이었다.

이렇게 태동한 대학들은 중세의 교권적 질서는 물론, 세속적인 봉건적 권력 모두에 대항하면서 대학의 자치권을 수호하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전개했다. 때문에 대학은 어떠한 세속 권력이나 교회 권력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권위의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지배적인 통념 모두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비판적 대안담론의 생성장소였다. 그것이 대학의 존재근거이자 실질적인 기능이었고 또 이념이었다.

한국의 대학 역시 얼마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이러한 대학 본연의 기능에 충실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혹독한 정치적 기후 속에서도 대학이라는 지성의 공화국에서 학생과 교수 지식인들은 대안적인 지식과 비전을 구성하기 위한 창조적 공간으로서의 견결한 사명을 다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대학이 처해 있는 상황은 어떠한가. 가령 기나긴 학내분규를 겪고 있는 동덕여대를 보라. 학생들의 자치조직인 총학생회를 대학당국이 부정하면서 학내분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왜 아무런 권리도 없는 대학당국이 학생들의 자치조직에 대한 불신임 여론을 유포하는가. 고려대는 또 어떤가. 어떻게 대학당국이 군사독재 시절에도 자행되지 않았던 ‘출교’라는 극단적 징계를 내릴 수 있는가. 또 왜 고려대의 교수들은 그런 학생들의 상황에 대해 집단적으로 침묵하고 있는가. 교수들 역시 월급쟁이로 전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특히 심각한 것은 ‘대학’과 ‘기업’을 구분 못하는 오늘의 교육현실 전체이다. 신영복 교수는 “자본의 지배력이 점점 커지면서 대학마저도 자본논리에 편입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안타까움을 넘어서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오늘날 몇몇 큰 대학을 빼고는 이미 대학 전체가 ‘회사’가 되어버렸다. 대학의 명성을 좌우하는 것은 ‘취업률’이고, 교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는 ‘신입생 모집률’이며, 학생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은 차라리 ‘토익점수’다. 그런 한국의 대학들은 대체로 ‘취업 준비학원’으로 전락하고 있지만, 더 심각한 재앙은 교육시장 개방을 거세게 밀어붙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이런 대학들조차 격심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대학은 학문이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의 유일신은 ‘돈’인 듯하며, 대학의 주인은 교수나 학생이 아닌, ‘상인’들 중에서도 자못 저열한 ‘간상배’들인 것처럼 느껴져 비통하다. 그렇다고 교수와 학생들이 그저 주저앉아야 할까. ‘창조적인 역발상’이 가능하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대학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떨까. ‘사회비판 담론의 산실’이자 ‘국제적인 지성주의’의 공화국으로 기능할 대안적 대학의 존재는 과연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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