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14 19:29
수정 : 2006.06.1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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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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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9년 전 〈판관 포청천〉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드라마의 인기가 실로 대단했는데, 주인공인 포청천이 당시 서울시장 조순씨와 비슷하다는 설이 유포되었다. 그 설은 삽시간에 퍼져 조씨의 지지도가 급속히 상승하는 결과를 빚는데, 이에 고무된 조씨는 결국 시장직을 버리고 대권 출마를 선언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들 중 두 명이 군대에 못 간 사실을 공개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포청천〉이 끝나면서 그의 인기도 사그라졌고, 그를 후보로 내세운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합병되면서 대권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박정희 신드롬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민주화 투쟁을 했던 대통령이 경제를 말아먹자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는 풍조가 확산된 탓이었고, 박정희를 모시던 신문의 논객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지저분한 글을 써서 박정희 신드롬에 기름을 부었다. 그와 동시에 이인제씨가 박정희와 닮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흥분한 이씨는 경기도민을 버려두고 대선에 출마했는데, 그가 믿을 건 이미지뿐인지라 ‘박정희와 키가 1㎜도 차이나지 않는다’는 말이 유세에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인기도 거품이었다. 보수언론이 양자구도로 몰아가기도 했지만, 박정희에 편승한 이인제의 인기는 결코 오래갈 것이 아니었다. 그때 참지 못함으로써 그는 경선불복이란 치명적인 상처를 자초했고, 5년 뒤에도 또다시 경선에 불복함으로써 그의 정치생명은 막을 내렸다.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대한민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월드컵의 성공을 가져온 정몽준의 인기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지지도가 오르기 시작하자 정몽준도 흥분의 덫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선거구도를 3파전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월드컵의 기억이 잊힘에 따라, 그리고 정몽준이 각종 토론회에서 좌충우돌함에 따라 그의 지지도는 낮아져만 갔다. 결국 정몽준은 노무현과 단일화를 해야 했고, 그나마도 선거 하루 전날 유례없는 경선파기 선언을 함으로써 한국 정치를 코미디로 만들었다.
법무부 장관을 마치고 변호사로 돌아간 강금실의 경우,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강금실 서울시장론’이 대두하였다. 여론조사에서 그가 계속 1등으로 나오자 지지도가 바닥이던 열린우리당은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데 급급한 나머지 강금실에게 매달렸다. 출마선언 직후 ‘지지도 1위 후보’를 거듭 강조하던 강금실은 역시 이미지로 승부하는 정치인을 만나 상승세가 꺾였고, 결국 참패하고 만다. 여성으로서 서울시장에 도전한 건 나름대로 평가받을 구석이 있고, 강금실이 나름의 내실을 갖춘 괜찮은 정치인이었건만, 민심은 그렇듯 야박했다.
고건. 각종 요직을 두루 거친 ‘행정의 달인’이다. 그가 풍기는 안정적 이미지 때문에 고건의 지지도는 늘 높지만,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면 의당 있어야 할 자기 색깔이 그에게선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른 정당들이 앞 다투어 그를 영입하려 목을 매겠는가. 그가 높은 지지도에 도취되어 탄핵 때 잠깐 해본 대통령 자리에 미련을 갖는 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이미지로 쌓은 그의 인기가 대선 출마 이후에도 계속 유지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민심은 변덕이 심하며, 헹가래를 친 뒤 손을 놔 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을 즐겨 한다. 그러니 너무 민심을 믿지 말자.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자유지만 말이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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