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24 20:47
수정 : 2006.07.24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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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클리닉 책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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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지난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암과 담배에 관한 학회에 다녀왔다. 개막식이 시작되자, 미국 암협회 존 세프린 의장은 원래 축사가 예정되어 있던 이종욱 박사의 타계에 충격을 받았다며 그분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대형 스크린에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웃음 띤 모습이 비춰졌고 참석자들은 모두 숙연하게 묵념을 했다. 나는 넓은 회의장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종욱 총장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지만 차라리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편이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뵌 것은 이 총장이 2002년 11월 세계보건기구 결핵국장으로 북한을 두 번 방문한 직후였다. 당시 세계보건기구 총장 선거 출마를 앞두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귀국한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어린이 건강 심포지엄’에 참석해서 북한의 결핵 실태를 설명하고 북한 어린이를 돕고자 1997년에 결성한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의 활동을 격려했던 것이다.
그날 심포지엄이 끝나고 늦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 총장은, 통일을 하면 남한 경제에 부담이 되고 세금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로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북의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것이 남한의 말라리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세계를 크게 보고 멀리 봐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했다.
1995년부터 북쪽이 홍수로 인한 기근에 시달릴 때 영양결핍과 의약품 부족으로 어린이들이 죽거나 질병에 시달린다는 참상을 접하고,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 보건의료인들이 모여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를 만들어서 활동한 지 어느새 1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나 북쪽의 어린이를 도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던 소박한 소망은 연락과 접촉이 힘든 남북의 특수한 상황, 변덕스러운 북의 입장과 국제정세로 인해 짜증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올해 3월 우리 정부는 식량난 때문에 제대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 북한의 영유아 지원을 위해 앞으로 2년간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2500만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북쪽 어린이의 주요 사망원인은 아직도 설사병과 급성 호흡기 감염증이다. 설사병은 초기에 항생제와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해주면 바로 회복되어 생명을 잃는 경우가 드문데 북한에서는 이런 간단한 조처조차도 어려워 많은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십대 청소년들의 평균 키 차이가 무려 10~15㎝라는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유럽인종과 우리 젊은이들 사이의 키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가 한 세대 안에 영양결핍과 질병으로 같은 민족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 참상이 충분히 짐작이 간다.
미사일 정국으로 인해서 다시 대북지원과 경협에 빨간불이 켜졌다. 한편에서는 우리가 왜 북에 질질 끌려가야 하느냐고 화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대북지원의 위기는 고스란히 죄 없는 어린이들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정세 변화에 따라 대북정책이 우왕좌왕할 때마다 남북한을 뛰어넘었던 것은 물론이고 세계인으로 살았던 거인 이종욱 총장이 더욱 생각난다. 취미로 천문학과 물리학 공부를 한다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면 ‘까짓거 태양도 몇십억년이면 꺼진다는데…’라고 크게 생각했다는 이 총장의 큰 지혜가 절실한 세상이다.
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클리닉 책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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