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31 20:35
수정 : 2006.07.3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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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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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흔히 수십 년 똑같은 이야기를 우려먹는다고들 하는 대중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미세한 변화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그 시대 세태의 변화를 민감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요즘 트렌디 드라마는 돈도 배경도 없으나 예쁘고 발랄·솔직·성실한 여자 주인공이, 기업 후계자인 다소 거만하지만 가슴 한편에 외로움을 간직한 부잣집 아들(대개는 ‘실장님’)과, 돈도 배경도 없으나 열정적 사랑과 마음의 상처를 거친 주먹과 반항적 몸짓으로 드러내는 거리의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1960년대 영화나 드라마에는 성(性)이 정반대이다. 돈도 배경도 없으나 출중한 외모와 정의감과 도전의식을 지닌 남자 주인공이, 거만하지만 발랄하여 매력적인 부잣집 외동딸과, 오로지 그 남자만을 바라보며 온갖 헌신을 다하는 가난하고 착한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가 많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춘물이 남성의 판타지에서 여성의 판타지로 바뀐 것이다. 60년대 청춘물들은 좋은 후원자를 얻어 성공하고 싶어하는 젊은 남성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남성 주인공은, 부잣집 외동딸의 귀여우면서도 거만한 태도에 자존심 상해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외동딸은 같잖은 자존심을 세우며 자신에게 뻣뻣하게 구는 그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마치 요즘 드라마에서 돈 많고 잘생긴 ‘실장님’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심지어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여주인공에게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하는 반응을 보이며 호감을 표시하는 것과 흡사하다.
당시 여자들이라고 왜 부잣집으로 시집가는 꿈이 없었으랴마는, 남성들에 견줘 그다지 강한 야망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듯하다. 주어진 팔자에 묶여 살거나 아니면 ‘또순이’처럼 서민가족 하나가 겨우 먹고살 만큼 가정을 추스르는 데 머물렀다. 반면에 남자들은 야망을 드러냈고, 가진 것 없으나 잘난 자신에게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줄 후원자를 꿈꾸었던 모양이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신데렐라형 트렌디 드라마들은 그만큼 결혼을 통한 계층 상승 욕망을 드러낼 정도로, 여자들의 야망이 적극적이고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난 변화된 세상은 그다지 만만치 않다. 60년대 남자 주인공들은, 부잣집 사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 부잣집의 후계자가 되는 일종의 자수성가 꿈을 꾸고 있다. 부잣집 딸뿐 아니라 사장님인 그 아버지가 결정적으로 그 남자다운 사윗감에 호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자들은 기업체를 이어받아 능력을 발휘하는 자수성가의 꿈을 꾸고, 여자들은 알뜰절약 억척녀로 가정과 마을을 다시 세우는 자수성가를 꿈꾸었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의 신데렐라 여주인공들은 그저 사랑에 성공하면 그뿐이다.
그럼 요즘 남자들의 야망은? 글쎄! 새파랗게 젊은 후계자가 회사의 기획실장을 차고앉아 멋진 주인공으로 돋보이면서, 자수성가형 전문경영인은 오너의 경영권 상속을 방해하는 악인으로 설정되는 요즘 드라마의 세계 인식에서 남성들의 자수성가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혹시 자신에게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어서, 부자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있다면 모를까, 애초부터 별볼일없는 부모 밑에 태어난 아이가 아무리 능력이 있은들 무슨 자수성가의 기회가 주어질까 싶다.
적어도 대중예술을 보건대, 이 시대 젊은 대중들은 더는 자수성가의 꿈은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건달이든 양아치든 주먹 휘두르며 젊은 상처를 드러내는 영화와 드라마를 마냥 탓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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