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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7 21:43 수정 : 2006.08.17 21:43

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야!한국사회

많은 야구팬의 관심이 이승엽의 홈런과 박찬호의 승리 소식에 집중되어 있는 요즘, 무관심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비지땀을 흘리는 선수가 있다. 클리블랜드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는 최향남씨.

해태에서 뛰던 시절, 그의 별명은 ‘선동열’이었다. 불펜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위력적일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그는 대단한 새가슴이어서, 실전에서는 절대 자신의 공을 던지지 못했다. 5년을 허송세월하다 엘지로 간 최향남은 담력이 커져, 1998년 12승을 거두는 등 짧은 황금기를 누리기도 했다. 44승 49패라는 그저 그런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은 그는 올해 초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메이저리그에서 뛰기 위해서. 국내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고, 나이도 선수로서 환갑에 해당하는 서른여섯 살에. 물론 그를 주목하는 구단은 없었고, 마이너리그의 밑바닥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최향남은 메이저 바로 아래 단계인 트리플에이(A)의 선발투수가 되었다. 전반기 성적도 수준급이다. 5승(5패)에 불과하지만 방어율은 2.69, 메이저에 충분히 갈 성적이건만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20대 선수들을 놔두고 그에게 기회를 줄 구단은 없었다. 후반기 시작 무렵에는 아픈 곳도 없는데 부상자 명단에 올라 멍하니 15일을 보내기도 했다. 팀에 자리가 없다는 게 그 이유.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며칠 전 돌아온 그는 선발로 나와 6이닝을 1실점으로 막으며 6승째를 거둔다. “가을에 빅리그에 승격되는 걸 목표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그를 팬들은 이런 댓글로 격려한다. “후회 없이 도전해 보는 그 열정, 정말 훌륭하십니다.”

김병준씨. 지방자치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자인 그는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를 맺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 교육부총리 꿈을 키워 왔을 그는 지난 7월 결국 부총리에 임명되는 경사를 맞는다. 하지만 “내가 교육부총리의 적임자”라던 그에게 곧 시련이 닥친다. 제자의 박사논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학술지에 게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 게다가 그 논문을 대학 논문집에 또다시 게재함으로써 이중으로 우려먹었다는 것도 추가로 밝혀졌다. “관행이다”라며 버티는 그에게 사람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어떻게 교단에 서는 교육자가 양심을 판단 말인가?”

우리 생각과 달리 학계라는 곳은 그리 맑지가 못한지라,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행들 중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기도 안 찰 것들이 꽤 있다. 그러니 마음먹고 털면 먼지 안 날 교수가 얼마나 될까 싶은데, 그건 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물러났다면 모양새가 나았겠지만, 버티기로 일관함으로써 더 많은 의혹을 양산한 건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지도 못한 채 낙마하고 마는데, 관행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걸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찌되었건 그가 물러난 이후 학계에서 ‘연구관행,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단다. 관행에 길들여진 대학사회가 과연 바뀔지 의구심이 일지만, 앞으로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공직에 진출할 꿈을 가지고 있는 교수라면 그런 관행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

김병준씨가 ‘이젠 뭐하고 사나’를 고민하고 있을 다음 달, 어쩌면 최향남은 자신의 소망대로 빅리그 유니폼을 입고 추신수와 같이 클리블랜드 더그아웃에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끝에 결국 꿈을 이룬 사람을 보는 건 얼마나 아름다울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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