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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28 18:39 수정 : 2006.08.28 18:39

변혜정 이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야!한국사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큼 좋은 핑계 거리가 없다. 흔히 어떤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던지고 보는 말이다.(그러나 그 일이 중요하다면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은 자신의 성폭력 혐의에 대해 첫째, 기억이 나지 않는다(오리발형), 둘째, 술을 마셨다(술탓형), 셋째, 성폭력 해도 되는 ‘그렇고 그런 여자’이다(꽃뱀유혹형), 넷째, 그것은 성폭력이 아니라 (동의에 의한) 성관계이다(성관계형)라는 네 유형으로 대답한다. 이렇게 주장했는데도 범죄가 인정되면 마지막에 그들이 하는 말은 ‘재수가 나빠서’이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소리다.

2006년 8월23일, 술자리에서 여기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최연희 의원의 3차 공판이 열렸다. 첫 공판 때 그도 다른 성추행범처럼 “당시 상황에 대해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다투고 싶지 않다”며 일정 정도 범행을 시인(?)하면서 결국은 술 탓으로 돌렸다. 당시 그는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셔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추행을 했다’며 신체감정 촉탁을 의뢰했다. 뻔뻔스럽다. 그 신청을 기각한 법원은 개인적으로 자료를 제출하면 참조하겠다고 밝히더니 정말 3차 공판 때는 그의 ‘술 주량’ 논쟁으로 일관했다.

이 사건의 포인트는 가해자 자신이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는데도 ‘아직까지’ 주량 공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술이 그렇게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째서 성추행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는가? 만약 운전자가 자신의 음주운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면 음주운전 사실이 참작되는지 재판부에 묻고 싶다. 아직도 이 땅의 어떤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보다.

언론매체에 한 줄의 기사도 나가지 않은 3차 공판이 있던 날, 어느 여성포털 사이트에서는 어떤 얼빠진 사람이 자신 있게 ‘사이버 성폭력’을 저지르고 있었다. 여자들에게 맺힌 것이 많은지, 아니면 심심한지, 아니면 여자들에게 자신이 없는지, 왜 그 남자들은 성폭력을 일삼는 것일까? 성폭력을 저질러도 잘만 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정말 몰라서일까? 갑자기 필자는 최연희 사건으로 한창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 어느 국회의원이 쓴 글이 떠올랐다.

“‘명백한 성폭력’의 범주를 제외하고, 사소한 말 한마디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이 분위기는 … (중략) …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이성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기본적인 본능 자체를 무력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누구나 그 향기에 취하고 싶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자연의 순리이자 세상의 섭리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노출을 하고 그것을 즐기는 여성에 대해 남성들의 그 어떠한 반응조차 용납할 수 없다면 이는 ‘가치관의 독점’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들이 어떻게 성추행이 ‘문제’라고 감히 기억하겠는가? 성추행은 정말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인가 보다. 아니 특히 예민한 자들의 ‘가치관의 독점’인가 보다. 그러나 여성을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그렇고 그런 여자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과연 가치관의 독점인가? 그들이 왜 기억하지 않는지/못하는지 다시 묻고 싶다.

변혜정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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