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31 21:47
수정 : 2006.09.0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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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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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거창한 의제보다는, 아무래도 이즈음의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영화는 대중들의 취미영역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듯하다. 대중적 열광이 쓸쓸하게 퇴각해버린 문단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조차도 문인 그 자신의 무능의 근거로, 가장 낮은 바닥에서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나는 예술작품의 심미적 가치란, 협소한 경계 안에서의 차별화된 정체성과 장르 중심주의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예술가들은 예술행위 그 자체를 조소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당연시하게 한, 그 가공할 자본의 토네이도 운동에 저항할 연대와 협동의 자세를 버리면 안 된다. 어떤 예술일지라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유토피아고,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사회다. 그런데 그런 목표가 이즈음의 예술계에서는 얼마나 명료하게 발성되고 있는가.
최근에 영화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논란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김 감독 덕분에 엉뚱하게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도 보았고, 논란이 될 만한 영화비평과 관련기사들, 누리꾼의 게시물, 김 감독이 패널로 참여했던 심야의 토론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들었던 의문은 어찌하여 한국의 영화계에는 김 감독에 대한 냉소가 지배적인가 하는 것이었다.
〈괴물〉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김기덕의 예술가로서의 태도에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동의의 뜻은 가령 평론가 강한섭과 같이 영화산업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토론에 등장했던 스크린쿼터 옹호론자들처럼, 김기덕 영화를 ‘비상업 예술영화’나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로 고정시켜, 영화의 ‘종 다양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기묘한 ‘시혜적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김기덕을 옹호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에서 집요하게 변주되는 인간사회의 야성적 생태학, 반지식인주의, 통념화된 모럴과 에토스의 아이러닉한 전복, 지속적인 스타일의 변주와 혁신, 모멸을 통한 극한 자기반성 등의 내용물들이 한국 영화계에서는 참으로 희귀한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기덕의 영화는 예술을 통한 극한 성찰의 과정이, 실제로 얼마나 복잡미묘한 불편함과 고통에서 오는지를 관객에게 생생하게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런데 지금 김기덕을 둘러싼 세간의 논란들은 죄다 그런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논의와는 무관하게, 감독의 비유적이거나 아이러니를 동반한 발언에만 쏠려 있다. 김기덕의 영화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오직 감독의 입에서 나온 ‘발언’에만 집착하는 현실은 과연 정상적인가.
나는 김기덕이 자신의 영화를 더 이상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 깊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이라 생각했다. 아일랜드 문학의 거장인 제임스 조이스를 보라. 그는 거의 평생을 망명객 비슷한 처지로 살았다. 사실 모든 진정한 예술가의 내면은 이 세계에서는 보트피플 같은 심정 아닌가.
“내 영화는 쓰레기다.” 이런 발언이 발성됐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마음 속으로 항상 되뇌어왔던 “내 평론은 쓰레기다”라는 생각과의 동일성 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매 순간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전에 발표된 나의 모든 원고를 쓰레기로 간주해 왔다. 사실 모든 예술작품은 그 성과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늙어빠진 랭보의 시를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기덕이 옳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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