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2 17:52
수정 : 2007.01.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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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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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얼마 전 텔레비젼 뉴스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주 여성의 자녀들이 어머니가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고 학업지도를 할 수가 없어서 언어 능력은 물론 학업성취 수준이 떨어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코시안’ 아동의 학업성취 수준의 저하는 결국 가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에 이주여성에 대한 한국사회 적응 훈련과 한국어 교육 등 정책적 지원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였다. 이주 여성에 대한 한국어 및 한국 문화 교육은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는 데 1차적으로 필요한 지원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주민과 코시안 아동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한국 사회 적응을 돕는 지원프로그램만으로는 그들의 빈곤계층화를 막을 수 없다.
한국어 교육과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통해서 말과 교육 수준이 우리와 비슷해진다 한들 그들의 피부색마저 바꿀 수는 없을 테니,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소외의 문제가 말끔히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문제의 초점은 그들의 피부색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차별적 시선이다. 그들이 아무리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해도 토종 한국인들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끊임없이 주류 한국 사회에서 배제될 것이고, 결국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하층계급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불행이지만 한국 사회에도 심각한 불안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멸시, 소외, 가난은 범죄로 이어지고 우리 사회의 주변부에서 그들은 점점 고립된 집단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2005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이주민들의 폭동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의 이주민들은 교육 수준이 높아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거나 이름이 아랍계라는 이유로 취업 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이주민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에 늘 시달리며 살아가야 하고, 범죄자나 짐승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주눅들어야 했다. 그들이 거듭되는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근본적 이유는 주류 프랑스 사회의 인종차별이었다. 이렇게 볼 때 2년 전에 발생한 프랑스의 이주민 폭동 사태가 가까운 미래에 한국 사회에서 재연되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엘리자베스 김의 자전적 소설 <만 가지 슬픔>에서 지은이는 입양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미국 사회에 몇 가지 당부를 한 바 있다. 입양아들에게 주류 백인 사회로의 무조건적 적응을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이 겪는 문화적 충격을 이해하고, 아이들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국적 외모로 인해 어딜 가나 왕따였다. 한국에서는 서양인과 닮은 외모 때문에 짐승 취급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했고, 미국에서는 동양인을 닮은 외모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 한국과 미국 어디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거듭되는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물질적 안정이나 교육보다는 자신의 삶에 솔직하고 당당했던 생모로부터 받았던 사랑이었다.
코시안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자원은 그들 고유의 특성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존중받는 환경일 것이다. 자신의 문화와 생김새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동이 건강한 자아를 갖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 여성 및 코시안 아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코시안을 바라보는 토종(?) 한국인들의 태도와 의식 변화다. 인종 차별이라는 이름의 유리장벽을 걷어내는 일만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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