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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7 18:20 수정 : 2017.02.27 19:10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다시 과학기술이 선거용 장식으로 전락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소화도 되지 않은 채 지면을 장식하고, 과학기술자들을 국가 먹거리산업의 노예로 만드는 전략이 활보 중이다. 한때 캐나다 트뤼도 총리가 이론물리연구소에 들러 양자컴퓨팅에 대해 답변한 영상이 화제였다. 물리학자도 아닌 그가 정확히 양자컴퓨팅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러웠다. 한국 대선 후보 중, 준비 없이 누가 알파고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게 한국의 수준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정치에 불만이 많다. 그래도 한국 과학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인데, 정치 수준은 바닥이니까. 박정희 세대의 과학자들은 정치권에 애걸복걸했지만, 신세대 과학자들은 좀 다르다. ‘타운홀’ 미팅으로 대선 후보에게 보낼 질문을 고르고, 이들과 토론회를 연다. 정치에 종속적이던 과학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바닥 민심이 뜨겁다. 하지만 결론은 비슷하다. 연구비 규모를 늘리고, 기초연구에 좀 더 투자하고, 연구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정말 그게 다일까?

과기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들도 할 말은 많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수준이 2년째 세계 1위다. 물론 이 통계에는 과장이 좀 있다. 대부분의 연구비는 기업에서 나오며, 기초연구에 진짜로 투자되는 비용은 매우 적다. 관료편의주의와 연구비 사용의 비효율성은 이 엄청난 투자의 어두운 이면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나서 1주일도 채 안 돼 1조원 규모의 예산이 편성된 사건은, 이 주먹구구식 관료주의가 과기정책을 망치는 주범임을 드러내고도 남는다. 국가주의는 과기계의 폐쇄적 문화를 양산한다. 관료에서 교수, 학생으로 이어지는 뿌리 깊은 위계질서는 한국 과학기술의 질적 도약을 방해하는 적폐다. 하지만 이게 다일까?

한국 경제가 세계에 의존적이듯, 한국 과학기술도 세계에 의존적이다. 세계 과기계는 이미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다. 그 시작은 21세기를 전후해 기하급수적으로 배출된 박사 인력이다. 일자리의 증가가 뒤따르지 못했고, 박사학위 인력의 절반 정도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 학위공장 시스템은 전세계에 보편적이며 특히 인간유전체계획 이후 의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이 됐다. 과학기술자들은 의사나 변호사 집단처럼 자신들의 수를 조절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전세계 어디서든 과학기술자의 수는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이는 박사학위자의 대부분이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시대가 곧 온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의생명 분야의 특징은 노동집약적이고 산업화에 긴 시간과 오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분야 연구자들이야말로 기초분야 연구인력인 셈이다. 공대·의대 졸업자와 비교해도 의생명 분야의 훈련 기간은 지나치게 길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다른 분야로 진출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사회에 내던져진다. 10년 내내 연구실에서 일한 박사에게 세상은 전쟁터다. 의생명 박사학위자들은 이제 할 수 없이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아마 그들 중 상당수가 연구를 포기할 것이다. 이들을 위해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라는 말도 현실적이지 않다. 기초연구자의 수는 기껏해야 10만명, 대통령 선거에선 그다지 매력적인 집단은 아니다.

누군가는 분명 쉽지 않은 구조조정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단지 연구비를 늘리고,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으로는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 과학기술자들도 투쟁해야 할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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