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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8 19:03 수정 : 2017.03.08 20:30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결혼한 지 20개월. 함께 산 시간은 15개월. 비교적 간략한 결혼식에서 두 가지는 지키기로 했다. 동시입장, 결혼행진곡은 인터내셔널가로. 사소하지만 중요한 약속이었다. 성역할에 의지하지 말 것, ‘만국의 노동자’에서 여성 노동자를 망각하지 말 것. 아이는 없이 살기로 했다. ‘자녀 없는 기혼 여성’이 늘어나서 심각하다는데 내가 바로 그 ‘자녀 없는 기혼 여성’이고, 나는 자웅동체가 아니어서 이 기혼 여성 옆에는 자녀 없는 기혼 남성도 있다.

아내를 ‘공급’하려고 ‘음모론적 유포’를 기획하는 이들은 <아내 가뭄>이라는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까. 현실에서 결혼은 대부분 남성이 속한 집안에서 다른 집안의 여성 노동자를 흡수하는 제도다. 남성 기준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여성의 몸(‘밭’으로 부르는)과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재생산은 두 가지다. 출산과 밥. 사람을 낳고 돌보며 산자와 죽은 자의 밥을 먹이는 일이 여성의 임무다. 예쁘고 조용하게 밥하고 애 낳을 것, 이것이 여성에게 바라는 본분이다. 노예‘시장’에서도 여성 노예는 이 ‘생산성’ 때문에 더 선호받았다.

최근 신작이 나온 김훈의 인터뷰를 읽다가 절로 눈이 미끄러져 멈춘 구절이 있다. “이번 소설에서 말할 수 있는 희망이란 아주 사소한 희망이다. 갓난애가 태어나는 것, 특히 여자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일이다. 여성의 생명은 다시 그걸 가능하게 하니….” 여성의 이러한 생산성을 인류의 ‘희망’으로 본다면, 여자아이는 이 희망의 주체인 당사자가 아니라 일종의 ‘희망 셔틀’이 된다.

아내란 누구일까. 아니 ‘누구’이기는 한가. 오히려 ‘무엇’에 가까운 정체이다. 고대에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었다, 라고 과거형으로 쓰고 싶지만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현실을 보면 여전히 아내는 현재진행형으로 남편의 재산이다. 2017년에 이런 문장들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사고 나면 부인 옆에 다른 남자가 잔다”, “아내가 비리가 있다면 총으로 쏴죽였을 것이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목적으로 여성 배우자를 언급했지만 기본적인 의식의 밑바닥은 동일하다. 건설 현장에서 정치권에 이르기까지, ‘너의 아내’를 빌미로 상대를 다스리려 하며 ‘나의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의 정책을 주도하는 ‘고소득, 고학력’ 남성들의 가부장적 의식 수준은 심각하다. 현실 정치는 21세기, 가정에서는 19세기, 표현의 자유는 ‘나만’ 미국 기준으로, 밥상은 한국의 전통(?)에 따라, 여성의 몸은 나를 위한 재생산 도구.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굴절시켜 자기 편한 대로 재조립하고 있는 남성들의 좌우합작이다. 이런 의식을 가진 이들이 배웠다는 이유로 요직에 두루두루 있다. 한심한 정책이 이어질 수밖에.

왜 한국에 태어나는 사람이 줄어드는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없이 저출산의 결과만 말한다. 원인제공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서 고학력, 고소득 여성에게 과녁을 맞추고 있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한 사무관이 복직하자마자 과로사한 사례를 보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사회에서 출산 거부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생존을 위한 동물적인 선택이다. 게다가 망상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고학력-저소득 여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무엇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진실. 고학력에 고소득인 남성은 어떻게 그 학력과 소득을 얻을 수 있었는가. 자, 이에 대해 솔직히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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