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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4 18:07 수정 : 2018.01.24 19:08

손아람
작가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신년호 1면에 개헌 관련 기사를 배치했다. <경향신문>은 파격적으로 전면을 두 문장으로 채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독일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1조 1항이다.

국가 기조인 헌법 제1조는 한 나라의 역사이자 현재이며 미래를 향한 예언적 소망을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 부침을 겪었던 아시아 국가들은 헌법 제1조로 통치 원리를 못박아 두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내세운 것처럼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중국은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를, 강대국 사이에서 자치권 투쟁을 해온 몽골은 독립국임을, 수천년간 내분을 겪어온 인도는 연방제를 헌법 제1조에서 규정했다. 반면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의 서유럽 국가들은 헌법 제1조로 인권을 내세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독일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독일 바이마르 헌법 제1조를 원형으로 삼았다.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통치 체제와 수권 원리를 제1조에서 규정하는 바이마르 헌법 양식에 종전 이후 많은 아시아 신생국 헌법이 영향을 받았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자생적인 정치철학을 형성할 역사의 숙려기간을 갖지 못했기에 ‘헌법 선진국’이 도달한 역사적 모범답안을 베껴 오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초대 헌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1949년에 독일은 이 모범답안을 버렸다. 바이마르 헌법이 역사의 검증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수권했고 히틀러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적인’ 통치력을 행사했다. 바이마르 헌법 제1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정권이었다. 근본적인 통치 원리는 소수자의 학살이나 침략전쟁과 충돌하지 않았다. 단순하고 우아하게 체제를 정의했지만 인간적인 표정이 없는 법이었다. 나치가 득세하던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의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감지한 극작가 브레히트는 <바이마르 헌법 제1조>라는 시에서 일찌감치 헌법 제1조의 빈자리에 의문을 표시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는 거겠지?/ 경찰이 건물에서 줄줄이 나온다/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는 거겠지!’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도 바이마르 헌법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불변이었다. 10차 개헌 논의에서도 헌법 제1조의 근본적인 수정은 검토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이 옥살이를 치렀거나 치르고 있고, 곧 그 명단에 한 명이 더 추가될 듯하다. 그들은 브레히트의 시처럼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고, 브레히트의 시처럼 살인적인 경찰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광장에 나선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반복해서 외쳤다. 냉정하게 되짚어보자. 어떤 대통령이 헌법 제1조를 위반했는가?

감히 헌법 제1조에 도전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통치 체제의 근본적인 원리이지만, 인간은 통치 체제 따위보다 까마득히 근본적인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언명이 없는 헌법 제1조는 근본 원리로서는 너무 허약하다. 세상에 남겨야 할 딱 한 개의 법조항이라면 제헌위원들도 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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