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06 16:24
수정 : 2019.05.0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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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관. 김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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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집단은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감시받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 집단은 정치인들로 구성된다. 한국 국회의 제도적 부실과 도덕적 해이는 절망적이다. 기본적인 상식을 지닌 국민은, 대화보다는 싸움을, 국민보다는 기득권을, 발전보다는 퇴행을 향하는 국회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안다. 선거라는 제도 외에는 국회를 심판할 수 없는 국민은, 지금 국회가 일하지 않는 이유의 핵심에 다시 선거제도가 놓여 있음에 절망한다. 민주주의가 느리고 불편한 제도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도대체 한국 국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을 패스한 율사들로 가득한 국회가 지적으로 열등할 리 없다. 강렬한 도덕적 열망으로 독재에 항거했던 사람들이 가득한 국회에 도덕적 감수성이 부족할 리도 없다. 젠더 감수성이 여전히 부족하지만, 국회의 여성 의원 수도 크게 증가했다. 정당을 호령하던 총재들의 시대는 끝났고, 국회선진화법과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을 비롯한 제도적 장치들이 이전보다는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국회는 싸우고 탕진할 뿐 일하고 전진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나는 그 이유를 국회에 과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다양한 층위에서 연구해온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해온 주제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와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자 사회가 진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발견했다. 포퍼는 이런 생각들을 반증 가능성과 열린 사회라는 틀로 설명했고, 폴라니는 개인적 지식이라는 틀로, 과학자 사회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통찰했다.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두 제도는 분명 서구적 기원을 지닌다. 언젠가 도올은 서구 제국주의의 우월함을 상징했던 이 두 제도를 동아시아 문명이 아주 빠르게 따라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과 민주주의를 이렇게 빠르게 따라잡았기 때문에 동양사상이야말로 진정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결론 내리기엔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에겐 비교적 잘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핍의 중심엔 과학이 놓여 있다.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의 책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 문제를 깊이 파헤친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학의 쓸모를 물질적으로 유용한 결과에서만 찾았다. 하지만 과학사회학의 새로운 물결을 상징하는 두 저자는 “과학은 도덕적 활동으로 여겨져야 하며, 과학적 연구의 특징이 되는 가치들이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도덕적 활동의 가치가 널리 알려져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좋은 가치들을 사회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학은 문명에 물질적 풍요를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내재한 가치들로 인해 사회를 도덕적으로 건강하게 축조하며,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민주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되는 셈이다. 과학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진보시키는 도덕적 촉진제로 기능한다.
국회에 당장 과학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선거법은 사표를 방지하는 방향으로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공수처 설치도 필요하고, 검경 수사권도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만 정비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문제없이 전진할 수 있는 것일까. 국회선진화법이 사적 이익에 매몰되는 현실은 우리가 그다음을 고민해야 한다는 징후일지 모른다. 국회에 과학을 스며들게 하는 일, 어쩌면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바로 그 일에 착수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과학과 분리해 생각했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데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구호도 가능할 것이다. 과학을 살려야 민주주의가 산다.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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