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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5 16:29 수정 : 2019.06.06 11:38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영화 <김군>을 봤다고 했을 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구의역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가 숨진 김군? 아니. 페미니스트가 싫어 이슬람국가(IS)로 떠났다는 김군? 아니. 그렇다면 어떤 김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는 1천만명이 넘는다. 네댓명 중 한 사람이 김씨다. 그렇기에 ‘김군’이라는 호명은 다양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영화 <김군>은 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사진 속 한 인물을 추적하며 그가 누구였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밝혀내는 다큐멘터리다. 카메라를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의 한 무장 시민.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제작진은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가 ‘김군’으로 불렸음을 알아낸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그의 삶이 끝났는지 80분간 (4년의 제작기간 동안) 집요하게 묻는다. 여기서 김군은 그러니까 ‘광주의 김군’이다. 그는 누구였는가. 또한 그가 누구였는지 밝혀내는 일에 왜 어떤 이들은 이토록 몰두하는가.

보수 논객 지만원이 80년 광주에 북한군 600명이 왔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광수’라 했다. 김군은 지만원이 ‘광수 1호’라 지목한 인물이다. 이런 것까지 대응해야 하나?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망언이 한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재생산된다. 반복되는 거짓은 어느새 진실의 자리를 넘본다. 그렇다면 이는 상대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 된다. 망언이 발언이 되어 역사를 휘젓는다.

김군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 시민군 생존자는 이러한 추적을 ‘역행’으로 본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당사자의 피로감과 울분이 느껴졌다. 지만원을 비롯한 극우세력이 시민을 북한군으로 규정하면 ‘북한군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북한군이 된다. 부당한 낙인과 공격은 당사자에게는 존재를 걸고 증명해야 하는 문제지만 공격하는 이들은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이처럼 망언은 생각보다 자생력이 강하고 생산된 뒤로는 스스로 영역을 넓혀간다. 또한 이 망언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모독한다. 사실을 왜곡하여 죽은 자를 조롱하는 행위는 오늘날 하나의 오락이다. 극우세력은 광주항쟁 희생자와 유가족,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비롯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한다. 이러한 태도는 인터넷 기반의 누리꾼 활동에 머물지 않고 극우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으로까지 이어졌다. 망언은 꾸준히 증언을 방해한다. 죽은 사람을 대리해 살아남은 이가 증언할 때 권력은 망언을 통해 이 증언의 고리를 끊으려 한다.

김군은 이미 자신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대신 김군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4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어도 간신히 그의 마지막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단서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앞으로 광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광주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광주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같은 고민이 찾아온다.

나는 광주라는 장소와 그때라는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군>의 강상우 감독 역시 광주 출신이 아니며 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세대가 아니다. 이처럼 그때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그때 그 장소를 기록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역사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김군>에서 생존자의 간절한 바람은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였다. 지만원이 20년간 망언을 늘어놓은 이유는 자신의 망언을 증명할 당사자가 거의 생존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사라진 뒤에도 증언을 이어가는 활동이 남은 사람들의 과제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바로 이러한 왜곡에 맞선 작품이었다. 망언은 망각을 주도한다. 김군이 누구였는가를 추적하는 일이 사소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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