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 교수 1880년대 청의 황준헌은 ‘고래’ 사이에 낀 조선에, 러시아에 대항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하여 ‘자강’을 도모하라는 로드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조선은 ‘자강’을 도모하기에 앞서 ‘고래 싸움’에 풍비박산이 났다. 강대국들의 눈에는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이 있을 뿐 ‘조선의 이익’은 없었다. 대국들의 갈등을 이용하려 한 ‘이이제이’ 외교는 종당엔 ‘이리를 집안에 끌어들인’ 격이 됐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대국들의 갈등과 충돌에 최종 중재자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전쟁이라는 ‘쾌도’는 얽히고설킨 ‘난마’를 잘라 승패로 갈등과 충돌을 일소했다. 갑오중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그랬고, 그 일본은 결국 또 전쟁에 의해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일본이 투항한 뒤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는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남북 대결로 치달았다. 6·25 전쟁 전 1년 동안만 해도 남북은 하루 평균 2차례 무려 874차례의 무력 충돌을 겪었다. 38선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그렇지만 어느 대국도 그 충돌에 중재자로 나서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 38선은 남북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분계선이 아니었다. 서로 헌법에 상대의 영토를 자기 영토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잦은 무력 충돌이 가능한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38선을 그은 미국과 소련에는 엄연히 분계선이었다. 그 구도는 미국과 소련 어느 한쪽이 깨지 않으면 깨질 수 없는 구도였다. 결과적으로 그 구도를 결정적으로 깬 것은 대국의 전략이익이었다. 남북 대결이 불러온 최후의 중재자는 역시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미-소 대리전’으로 불린 그 전쟁은 38선에서 시작되어 38선에서 끝나며 분단을 고착시켰고, 원점으로 돌아온 남북은 지지리도 긴 60여년간 대결을 펼쳐왔다. 냉전 시기 남북의 대결은 미-소 냉전의 프레임 안에 갇혀 무력 충돌까지 치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국들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나 평화통일을 위해 발 벗고 중재자로 나선 것도 아니었다. 대국들의 전략이익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1954년의 제네바 회의는 명목상 대국들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열린 것이라지만, 그것은 대국 간 대결의 다른 한 형식일 뿐이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한반도는 화해와 협력, 나아가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대국들이 남북한과 교차 승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남북 화해·협력의 중재자로 나섰다면, 한반도에는 항구적 평화가 깃들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역시 대국들이 추구하는 전략이익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지탱점으로 아·태 전략을 펼치려면, 냉전 구도의 한반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북-미 간 북핵 문제의 발단이기도 하다. 결국, 한반도 문제는 분단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국 간 전략 갈등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최종 중재자가 대국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남북이 피 터지게 싸워주는 것이 대국들에는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있기에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교통 정리’도 훨씬 순탄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국들의 갈등 구도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당장 3월이면 미국의 어마어마한 전략 자산들이 밀려든다. 중·러를 자극하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도 강행된다. 한국의 탄핵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소용돌이치던 해방 정국을 연상케 하고 날이 갈수록 진동하는 화약 냄새는 한국전쟁 전의 무력 충돌을 떠오르게 한다. ‘미국 우선’을 내세운 트럼프의 미국은 ‘선제공격론’을 빼들었다. 모두들 ‘엄포’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를 보면, 국가도 본능적 충동으로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대결에 지칠 대로 지쳐, 이젠 끝을 보아야 하는 한반도이다. 최종 중재자를 맞이하는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 최종 중재자는 대국도, 전쟁도 아닌 한반도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칼럼 |
[세계의 창] 한반도 문제의 최종 중재자 / 진징이 |
베이징대 교수 1880년대 청의 황준헌은 ‘고래’ 사이에 낀 조선에, 러시아에 대항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하여 ‘자강’을 도모하라는 로드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조선은 ‘자강’을 도모하기에 앞서 ‘고래 싸움’에 풍비박산이 났다. 강대국들의 눈에는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이 있을 뿐 ‘조선의 이익’은 없었다. 대국들의 갈등을 이용하려 한 ‘이이제이’ 외교는 종당엔 ‘이리를 집안에 끌어들인’ 격이 됐다.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대국들의 갈등과 충돌에 최종 중재자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전쟁이라는 ‘쾌도’는 얽히고설킨 ‘난마’를 잘라 승패로 갈등과 충돌을 일소했다. 갑오중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그랬고, 그 일본은 결국 또 전쟁에 의해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일본이 투항한 뒤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는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남북 대결로 치달았다. 6·25 전쟁 전 1년 동안만 해도 남북은 하루 평균 2차례 무려 874차례의 무력 충돌을 겪었다. 38선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그렇지만 어느 대국도 그 충돌에 중재자로 나서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 38선은 남북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분계선이 아니었다. 서로 헌법에 상대의 영토를 자기 영토로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잦은 무력 충돌이 가능한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38선을 그은 미국과 소련에는 엄연히 분계선이었다. 그 구도는 미국과 소련 어느 한쪽이 깨지 않으면 깨질 수 없는 구도였다. 결과적으로 그 구도를 결정적으로 깬 것은 대국의 전략이익이었다. 남북 대결이 불러온 최후의 중재자는 역시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미-소 대리전’으로 불린 그 전쟁은 38선에서 시작되어 38선에서 끝나며 분단을 고착시켰고, 원점으로 돌아온 남북은 지지리도 긴 60여년간 대결을 펼쳐왔다. 냉전 시기 남북의 대결은 미-소 냉전의 프레임 안에 갇혀 무력 충돌까지 치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국들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나 평화통일을 위해 발 벗고 중재자로 나선 것도 아니었다. 대국들의 전략이익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1954년의 제네바 회의는 명목상 대국들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열린 것이라지만, 그것은 대국 간 대결의 다른 한 형식일 뿐이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한반도는 화해와 협력, 나아가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대국들이 남북한과 교차 승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남북 화해·협력의 중재자로 나섰다면, 한반도에는 항구적 평화가 깃들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역시 대국들이 추구하는 전략이익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지탱점으로 아·태 전략을 펼치려면, 냉전 구도의 한반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북-미 간 북핵 문제의 발단이기도 하다. 결국, 한반도 문제는 분단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국 간 전략 갈등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최종 중재자가 대국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남북이 피 터지게 싸워주는 것이 대국들에는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있기에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교통 정리’도 훨씬 순탄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국들의 갈등 구도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당장 3월이면 미국의 어마어마한 전략 자산들이 밀려든다. 중·러를 자극하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도 강행된다. 한국의 탄핵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소용돌이치던 해방 정국을 연상케 하고 날이 갈수록 진동하는 화약 냄새는 한국전쟁 전의 무력 충돌을 떠오르게 한다. ‘미국 우선’을 내세운 트럼프의 미국은 ‘선제공격론’을 빼들었다. 모두들 ‘엄포’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를 보면, 국가도 본능적 충동으로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대결에 지칠 대로 지쳐, 이젠 끝을 보아야 하는 한반도이다. 최종 중재자를 맞이하는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 최종 중재자는 대국도, 전쟁도 아닌 한반도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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